한 때 내게 시는 '그건 왜 읽어?'였다. 언젠가 내려올 산 정상에 왜 올라가냐는 물음과 일맥상통하는 존재였다고나 할까. 그랬는데 책의 '싱싱했다'는 어미에 매혹되었다. 고등어에 붙일법 한 이 말이 도대체 어떻게 현현할 것인가. 시집은 공광규, 권민경, 김상혁, 김안 등 열세명 시인들의 작품을 담고 있다. 단편모음집처럼 읽혀 좋았다. 또 해석하기 나름이니 정답이 없어 좋고!
권민경 작가의 <뻐꾸기 시계>가 인상적이다. 친구와 놀고싶은 주인공이 읽힌다. 그런데 할머니를 찾네. 친구들 모두 할머니랑 같이 사는데, 소개시켜주지는 않나보다. '아줌마'라고 하면 시큼한 김치 냄새가 연상되듯, '할머니'라고 하면 따뜻하고 그윽한 냄새가 생각난다. 알고보니 친구와 놀고싶던 주인공은 '뻐꾸기 시계'다. 시계는 자신을 돌보던 아이의 할머니, 또 그 할머니의 할머니. 누군가의 가보였나보다.
정민식 작가의 <어린 나의 외국어>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어린 나의 외국어는 궁금한 게 많아 질문하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p.135)는 문장은 "하고 싶은 말 대신 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과 연결된다. 생각은 결국 '언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생기고, 타인에게 가닿을 수 있다. 그래서 '관계'에서는 입 안에 굴러다니는 말 대신 '해야할 말'을 해야할 때가 많다. 서로의 언어가 다르고 의미가 상이하기에. 가닿을 수 있는 '일종의 약속'만 떠들게된다. 이 시는 그런 답답함을 표현한 것 같다. 내 언어의 짧음도 한탄하게 하고.
전영관 시인의 <화엄사 수채화>에서는 눈물이 났다. "사람들이 기와불사에 이름 쓰느라 모여 있다. 등이 젖는 줄도 모른다."(p.130) 절에 가면 간절함이 가득하다. 엎드린 등에서, 중얼거리는 입에서, 기도하는 모습에서. 인생의 위기였던 작년 겨울, 아이들을 하늘에 보내며 나도 절을 찾았었다. 놀러갔는데 울고 나왔다. 끝없는 울음에 남편도 같이 울었다. 미안했다. 매달리고 싶었다. 잘 보내주고 싶었다. 잘 보내줬다 믿고 싶었다. 영험함이 불쑥 솟아날듯한 불상의 눈에 끝없이 빌었다. 그 때 내 등도 젖어 있었다.
소설을 읽지 않는 한 작가는 시집을 좋아한다고 했다. 건질 문장이 많다는 이유였다. 완전히 공감하진 않지만, '건질 문장'이 많아 시집이 좋다는 데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르고 고른 단어에 마음이 붙잡힌다. 글자는 없는데 감정은 빼곡하다. 그 의미를 생각하며 한 음절 한 음절 되새겨본다. 어쩌면 '시'는 나를 돌아보는 '성찰'같은 존재일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요즘 시가 너무 좋다. 제목도 고민하게 된다. 뛰는, 헐떡이는, 살아있는.. 뭐가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