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산책 - 자연과 세상을 끌어안은 열 명의 여성 작가들을 위한 걷기의 기록
케리 앤드류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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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루 1시간을 걷고 있다. 해가 따뜻한 시간, 그 날 제일 눈에 띄는 운동복을 입고 이어폰을 끼고 집을 나선다. 걷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 아팠던 몸이 회복되고 어지러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앙상했던 나무들이 잎을 만들어 내고, 아기자기 꽃망울들이 피어나면서 눈이 즐거운 건 덤이다. 왜 사람들이 매일 걸으라고 하는지, 진심으로 깨닫고 즐기는 요즘이다.

책 <자기만의 산책>은 여성 작가들의 '걷기'를 다룬다. 왜 여성인가? 작가는 그간 걷기에 관한 글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가려졌는지를 분석한다. 민슐 던컨의 책 <방랑하는 동안 : 걷기에 대한 글>에서는 270개 꼭지 중 단 26개만이 여성 작가가 쓴 글을 다뤘고, 프레테리크 그로의 책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는 오로지 남성 산책자들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로의 책이 지닌 문제는 더 있다.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를 '그he'로 표현함으로써 - 여성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 '걷기가 남성의 활동이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고 분명하게 강조한다'(p.23)고 저자는 지적한다. 하여 낭만주의 시대 여성 작가들의 글을 분석해온 저자, 케리 앤드류스는 말한다. '여자들도 걷는다'고.

저자는 '지난 300년 동안 걷기가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겠다'(p.20)고 책의 의도를 분명히 밝힌다. 주인공들은 엘리자베스 카터, 도로시 워즈워스, 버지니아 울프 등을 비롯한 총 10명의 작가들이다. 그 중 가장 인상깊은 사연의 주인공은 사라 스토타트 해즐릿이다. 사라는 '14년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온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p.138) 걷는다. 돈과 명예 그 무엇도 없던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서는 '간통을 들켜야' 했고, 사라는 이 계획에 가담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 과정속의 사라는 부정적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해 걷기 시작해, 8일 동안 총 170마일을 걷는다. 하루 34km씩 약 273km를 걸은 셈이다. 저자는 사라의 일기를 통해 걷기가 주는 '상당한 육체적 통증과 불편'이 점차 '영적인 의미를 지닌 경험으로 승격된다.'고 적는다.

가장 힘든 길이었는데 거길 오르느라 어찌나 지치고 덥던지 도중에 산속에 있는 샘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기진했을 것이다. (중략) 신이 만드신 모든 작품에서 그의 보살핌과 친절이 보이는 것 같다. 여기 있는 그 어떤 것도 모순되는 것이 없다. (p.150) - 사라 스토타트 해즐릿

이밖에 다른 작가들에게도 '걷기'는 유효했다. 걷기는 카터에게 '풍부한 소재의 원천'이었고, 도로시 워즈워스에게는 '도덕적 용기를 내게 해주는 일'이었다. 엘렌 위튼에게는 '자유'를 의미했으며, 5년 동안 걸을 수 없었던 해리엇 마티노에게는 최면술로 증세가 고쳐지자 '탐험이라는 즐거운 노동'이 된다. 또,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자신감의 창구'였고, 아나이스 닌에게는 '창의력의 근원'이 되었다. 두 발로 걷는 행위가 그들에게는 '해방구'이자 '마르지 않는 샘'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작가들이 남긴 작품과 편지, 일기 등에서 발견된 흔적에서 '걷기'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 다소 투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래서 더 새롭다. 몰랐던 작가들을 알게되는 묘미도 있다. (책은 우리가 잘 아는 작가, 제인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조르주 상드 등의 작가들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걷기'도 <부록>으로 담는다) 작가들이 '걷기가 이래서 좋다!'라고 명시해두지 않은 이상, '걷기'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들이 활동했던 시대, 그 사람의 성향, 주변 인물, 환경 등 여러 '맥락'이 작용했을 테니까. 책의 말미에는 60권에 달하는 참고 도서가 담겨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읽었을 책 목록들이다. 저자가 <감사의 글>에서 '런던의 대영 도서관 사서들의 노고에도 감사를 표합니다'(p.353)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단박에 이해된다.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걷기와 그에 대한 글쓰기가 개인적으로 지극히 고통스러운 시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떤 데 큰 보탬이 됐다는 점은 분명하게 입증한다. (p.29)

나도 걷는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장 손쉬운 건강회복 수단으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머리는 맑아지고 몸은 건강해진다. 마음은 넓어지고 생각은 또렷해진다.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누군가 후에 내 글을 읽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자주 기록을 해야겠다 마음먹게 된다. 나의 맥락을 파악해 걷기의 의미를 끌어내 줄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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