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이방인 - 194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소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를 그린다. 감정이 없는 듯 보이는 뫼르소. 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이튿날에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기까지 한다. 내연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편지를 대필해달라는 이웃 레몽의 부탁을 들어주고, 편지를 쓴다. 레몽의 초대로 해변을 즐기던 중, 내연녀의 오빠(아랍인들)과 마주치고, 우연히 레몽의 총을 들고 있던 그는 총을 쏘고 만다. 여전히 무감하던 그는 재판에서 사형에 처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사장은 내게 삶에 변화를 주는 데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모든 삶이 어쨌든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법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삶도 내게는 전혀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슬픔, 사랑, 분노, 욕망 등의 감정이 일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행적은 일반의 그것과 다르다. 엄마 장례식에서 밀크 커피를 찾고, 시체 옆에서 담배를 핀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재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감형을 받기 위한 노력이나 변명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뉘우쳤다고 말하는 것은 귀찮다고 까지 한다. 일반적인 사고와 다른 주인공의 궤적, 그 간극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카뮈의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는 말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사형선고는 타인의 나에 대한 재단이다. 이건 일반적인 사고의 산물이며, 해석된 결과다. 그러나 당사자는 울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즉 위의 간극은 거리감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살아있는’ 감정 자체와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 윤리, 편견 등. 그 둘의 괴리 말이다. 마지막 뫼르소는 “아무도, 그 누구도 엄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권리는 없다. (p.156)”고 말한다. 모두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꼭 그러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감정이 느껴질 때, 자신으로 존재할 때 가능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나와 세계가 무척 닮아 마치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감하고 소외된 듯 보인 그는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재판에서의 뫼르소의 태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모두가 - 진실을 왜곡해 도우려는 변호사, 하느님을 언급하며 주인공을 설득하려는 재판관, 구원하겠다며 찾아온 사제 -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는 그대로 사건을 내버려둔다. 결국 뫼르소는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났기에 '이방인'이 된다. 주인공은 유독 “무의하다”는 말을 자주한다. 작가의 실존주의를 의미하는 것일까. 실존주의는 이성, 인간성과 같은 보편적 본질보다 인간의 실존, 존재가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무감하던 뫼르소가 사형의 순간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이를 대변하는 것으로 읽힌다. 책은 얇지만 다소 난해했다. 뫼르소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그의 생각에 온 마음이 동할 수 없었다. 실존주의라는 철학에 대한 거리감과 마찬가지리라. 고전이라는 타이틀과 카뮈라는 작가의 권위가 제대로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학생 때 읽었던 <이방인>보다는 세밀한 결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훗날 나이를 더 먹으면, 내가 살아낸 시간이 늘어나면, 이 책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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