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텍 이삭줍기 환상문학 2
윌리엄 벡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림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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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기 환상문학의 두번째 작품 책 <바텍>이 나왔다. 열림원의 '이삭줍기 시리즈'는 다양한 세계문학 목록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시리즈는 기존에 널리 알려진 세계문학 작품 외에 문화적 이질감이나 특정 나라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명작들을 발굴하기 위한 프로젝트라고. 프랑스 작가 아벨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이상줍기 환상문학의 첫번째 작품이었다면, 두번째 작품은 바로 영국 작가 윌러엄 벡퍼드의 <바텍>이다.

이 작품에는 특이한 배경이 있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윌리엄 벡퍼드가 1782년 <바텍>을 불어로 썼다. 그 후, 새뮤얼 헨리가 저자의 감독하에 이것을 영어로 번역했지만 1786년 영국에서 이 번역판을 출간할 때 저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치 아랍의 텍스트를 번역한 것 처럼 꾸몄다고 한다. 결국 "벡퍼드는 1816년 내용과 주석을 고쳐서 제3판을 냈고, 영어판 <바텍>은 이 제3판을 가리킨다(p.183)"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현재의 <바텍>역시 제3판이 원전인 셈이다.

책은 이슬람 국가의 칼리프 바텍이 신 - 지아우르 - 를 따르지 않고 재물과 욕정을 탐하다 저주를 받는 이야기다. 책에는 두 가지 큰 욕망이 등장한다. 바텍의 어머니 카리타스의 욕망과 바텍의 그것이다. 카라티스가 절대권력으로 모든 신하들과 재물을 활용해 신조차 압도하려드는 반면, 바텍은 그저 아름다운 여인과 풍류를 즐기는 데 그친다. 이런 대조적 설정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해지며 독자들에게 점점 카리타스의 위세에 눌린 칼리프 바텍이 초라해 보이도록 한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는 인간, 또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일을 하려고 하는 무모한 인간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p.22)”

이야기는 풍부하고 과장적이다. 공상과 상상의 극한이라고 할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묘사는 이야기 속 장면이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그리게 만든다. 상상력의 극한을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공차기'다. 소설의 초반과 후반에 마치 수미상관을 노린 것처럼 공차기가 등장한다. 초반의 공차기가 인도인을 공으로 몰아서 바텍과 궁중 신하들이 차는 것이라면, 후반의 것은 바텍이 공이 되어 온 도성 사람들이 그 공을 차기 위해 서로 달려드는 장면이다. '공'이 된 주체는 다르지만 모두 '분출'한다는 측면에서 동일하고, 마지막의 공차기는 도성 사람들의 분노로 읽힌다. 더 나아가 내게는 바텍의 몰락으로 보여 쾌감마저 느껴진다.


환상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요소보다 가정적이고 비사실적인 요소 등으로 상상력이 강조된 문학(네이버 지식백과)'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라면 현실의 한 부분에 빗대어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을 가질 때 힘을 내는 것 아닐까. 이전에 접했던 환상문학에서는 "삶은 생각이 아니고, 투영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삶은 현재의 그것이며 TV에 비치는 것처럼 항상 지금이다."라는 말이 등장했다. 소설 <바텍>에서의 '그 지점'은 권선징악의 결말로 보인다. 욕망에 사로잡힌 바텍은 지아우르의 말을 잊고 공이 되고 희화화된다. 온갖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공을 차고자 밀치고 달려드는 장면은 씁쓸하면서도 희열이 느껴진다. 독자는 여기서 '결국 돌아온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책 <바텍>을 읽으면서 작가가 어떻게 이런 세계관을 그릴 수 있었을까 끊임없이 물었다. 그간의 작품에서 보지 못했던 구조나 묘사와 달라 신선하고 발칙하다. 이게 바로 작품의 다양성일까? "우리는 고정관념에 얽매이거나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풍성한 책의 잔칫상을 차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책의 기획위원 김석희는 밝힌다.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롭고 다양한 작품을 기다렸던 독자들에게 희소식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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