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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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서 한 소년이 조사를 받고 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건지, 답을 모르는건지, 현장에 있었던건 맞는지, 애매하고 답답한 대화가 계속된다. 화자의 눈에 경찰은 화가 나있고, 조사받는 소년은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는 듯 하다. 이 광경을 회상하는 '나'는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해에 살해당한 여고생의 동생, '다언'이다.

<안녕 주정뱅이>의 작가 권여선이 장편소설 <레몬>으로 돌아왔다. 술을 매개로 인물들의 사연을 풀어내던 내러티브가 이번에는 '여고생 살인 사건'에 집중한다. 추리소설인 걸까? 어느 날 발생한 사건에 대해 책은 어떻게, 왜 일어난건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단서를 보여준다.

각 장에서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 반바지, 2002>에서 경찰은 한만우를 용의자로 간주하고 취조한다. 경찰의 말을 듣고 있으면 한만우가 범인인가 싶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복기하는 나는 말한다. "살인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 죽을 때까지 내가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도 알고 있다.(p.30)"고. 나의 혼잣말을 보고 있으면 또 다른 의심을 하게 된다. <2. 시, 2006>에서는 (자매와 친분이 있는)상희가 등장한다. 그녀는 사건 후의 학교를 "그 사건과 연루된 아이들 중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는 (중략) 윤태림뿐이었다.(p.52)"라고 묘사한다. 현장에도 있었고 사건 후에도 유일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가는 태림. 독자는 이번에 태림을 용의선상에 올린다.

그 와중에 서로 다른 두 자매의 모습이 양념처럼 버무려진다. 사회적이지 못한 혜언, 언니를 챙기는 자상한 성격에 활발하기까지 한 다언. 성격만큼 얼굴도 서로 다르다. '아름답다'고 표현되는 언니의 얼굴에 대해 다언의 질투를 독자들은 여러 지점에서 만난다. 각자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상희가 대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다언을 만나게 된다. 모습이 변한 다언을 보며 상희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아련해진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p.63)"고 말한다. 혜언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던 독자들은 상희의 사연을 암시하는 대목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상희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거지?

 

소설 <레몬>은 과일 '레몬'처럼 읽힌다. 레몬은 터질듯 탱글한 속살, 하얗고 연약한 속껍질, 그리고 단단한 노란 외피가 있다. 그 때를 살아낸 인물들의 이야기와 삶의 의미를 묻는 시간속에 '2002년의 사건'은 숨겨져있다. 겉껍질에 숨어있지만 얄팍한 속껍질이 찢어지는 순간, 터질듯한 노란 속살이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걸 확인한 후에야 내가 누구로 살지,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겠다.

(중략) 노란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레몬, 이라고 나는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p.94~95

짧게 소설 <레몬>을 만나보며 인물들 모두의 삶이 엉크러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상희와 다언이 깊은 여운을 준다. 시에서 멀어진 상희, 삶의 안전지대를 벗어난 다언.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 개개인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반전을 경험했다. 더나아가 나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과제도. 막힘없이 읽었다. 남은 부분이 더할나위없이 궁금하다. 사건으로 빨아들여놓고 동시에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다니, 역시 권여선 작가다. 레몬의 복수는 뭘까. 과연 범인은 누구인걸까. 그 결말이 궁금해지는 소설 <레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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