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한 소년이 조사를 받고 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건지, 답을 모르는건지, 현장에 있었던건 맞는지, 애매하고 답답한 대화가 계속된다. 화자의 눈에 경찰은 화가 나있고, 조사받는 소년은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는 듯 하다. 이 광경을 회상하는 '나'는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해에 살해당한 여고생의 동생, '다언'이다.
<안녕 주정뱅이>의 작가 권여선이 장편소설 <레몬>으로 돌아왔다. 술을 매개로 인물들의 사연을 풀어내던 내러티브가 이번에는 '여고생 살인 사건'에 집중한다. 추리소설인 걸까? 어느 날 발생한 사건에 대해 책은 어떻게, 왜 일어난건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단서를 보여준다.
각 장에서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 반바지, 2002>에서 경찰은 한만우를 용의자로 간주하고 취조한다. 경찰의 말을 듣고 있으면 한만우가 범인인가 싶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복기하는 나는 말한다. "살인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 죽을 때까지 내가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도 알고 있다.(p.30)"고. 나의 혼잣말을 보고 있으면 또 다른 의심을 하게 된다. <2. 시, 2006>에서는 (자매와 친분이 있는)상희가 등장한다. 그녀는 사건 후의 학교를 "그 사건과 연루된 아이들 중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는 (중략) 윤태림뿐이었다.(p.52)"라고 묘사한다. 현장에도 있었고 사건 후에도 유일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가는 태림. 독자는 이번에 태림을 용의선상에 올린다.
그 와중에 서로 다른 두 자매의 모습이 양념처럼 버무려진다. 사회적이지 못한 혜언, 언니를 챙기는 자상한 성격에 활발하기까지 한 다언. 성격만큼 얼굴도 서로 다르다. '아름답다'고 표현되는 언니의 얼굴에 대해 다언의 질투를 독자들은 여러 지점에서 만난다. 각자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상희가 대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다언을 만나게 된다. 모습이 변한 다언을 보며 상희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아련해진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p.63)"고 말한다. 혜언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던 독자들은 상희의 사연을 암시하는 대목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상희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