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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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집착은 같은 종류일까. 구분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는 걸까.  '사랑'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그리고 '집착'은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이라고 정의된다.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소년과 소녀가 성인이된 후 서로의 인생에 철저히 개입한다. 오랜시간 상대방을 그리워하다 괴롭히고 결국 파국으로 끌어내린다. 이건 사랑일까 집착일까. 그저 정신병에 불과한걸까.

힌들리와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 '히스클리프'라는 아이를 데려온다. 아이는 천대받는다. 가족들에게는 무시를, 하인들에게는 채찍질을 당한다. 책은 언쇼가 히스클리프를 데려온 이유를 - 영화에서는 종교적 이유를 잠깐 언급한다 -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히스클리프는 정체성이 모호한 존재로 언쇼가문에 얹혀 살게되며, 자연스레 자신을 '사람답게' 대해주는 '캐서린'에게 의지하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가진 광기의 뿌리 여기서 시작한다. 만약 아버지가 히스클리프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혹은 데려와서 그를 정확히 가족의 일원으로 인식시켰다면 어땠을까. 폭풍의 언덕의 미친 광풍같은 사건들은 벌어지지 않았을테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에게 사랑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 여러 지점에서 읽힌다. 어린 시절 폭풍의 언덕을 뛰어다니며, 물새 깃털을 가지고 함께 논다. 뿐만아니라 힌들리가 때리고 죠세프가 채찍질 할 때 캐서린은 언제나 히스클리프의 편에 서준다. 안타깝게도 두 주인공의 어긋남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고 만다. 에드거에게 청혼을 받고 이를 하녀 넬리에게 고백하는 캐서린. "나는 에드거 린턴과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야. 저 안에 있는 고약한 인간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결혼 같은 것은 생각조차 안 했을걸.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도 천해지는 거아." 여기까지 대화를 엿듣던 히스클리프는 집을 나가고 만다. 캐서린의 히스클리프에 대한 진심을 담은 마지막 말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p.130)"를 듣지 못한 채로. 바로 여기서 소설의 파국이 시작된다.

린턴에 대한 내 사랑은 숲 속의 잎사귀들 같아. 겨울이 나무의 모습을 바꾸듯 시간이 내 사랑을 변하게 하리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잇어. 하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땅속에 파묻힌 변치 않는 바윗돌 같아. 눈에 뵈는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 넬리, 내가 곧 히스클리프인 거야. 그 애는 내 마음속에 항상, 항상 있는 거야. 기쁨을 주려고 있는게 아니야. 내가 나 자신에게 항상 기쁨을 주지는 않잖아. 그 애는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진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하면 안돼.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어. (p132~133)


히스클리프는 장성해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온다. 도박에 빠진 힌들리에게 재산을 빼앗으며 복수를 시작한다. 그리고 린턴과 결혼한 캐서린을 찾아가는 데 에드거의 동생 이사벨라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또 다른 복수가 야기된다.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빠지도록 해 함께 도망가지만 이사벨라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자 히스클리프를 떠나 그의 아이인 린튼을 낳아 혼자 기르다 죽는다. 반면,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의 도망에 충격을 받아 정신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고 에드거마저 세상을 떠나자,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에드거의 딸인
캐시 린턴과 자신과 이사벨라 린턴아들인 린턴강제로 결혼시키고 언쇼가문과 린턴가문의 재산을 모두 차지한다. 복수는 성공한걸까. 결과적으로 실패다. 두 집안의 사람들을 모두 정신적/물질적으로 자신의 발 아래 두지만, 그는 캐서린의 망령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캐서린이 곁에 없었기에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싸움이었던거다. 그저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와 가졌던 순간들은 악에 받친 시간으로 만들어낸 의미없는 광기의 표현에 불과했다.


여러 종류의 감정들이 울컥이게 하는 책이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캐서린이 에드거도 히스클리프도 선택하지 않았다면? 캐서린이 이사벨라의 마음을 눈치채고 히스클리프를 도발하지 않았다면? 첫째로
남녀간의 '진솔함' 이 아쉽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에게 '내가 사랑하는 건 바로 너다' 혹은 '(이사벨라의 감정을 무시하고)내 옆에 있어달라고' 말했다면 히스클리프는 돌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심이 사랑의 가장 큰 무기라는 만고불변의 법칙은 소설에서도 통용된다. 두번째는 부모와 자식간의 '존중'이다. 히스클리프가 언쇼가문에게 복수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분노와 모멸을 각인시키기'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인데, 귀족가문의 핏줄로 태어났지만 히스클리프의 (의도된)모욕속에서 예의범절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그는 '분노'의 감정만을 가진채 짐승처럼 살아간다. 언행은 물론, 사고방식도 화와 모멸 그 자체다. 헤어턴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감정과 역할 등을 존중받는 상태로 컸다면 그의 말로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 마지막은 '감정의 객관화'다. (무리한 요구일수 있지만)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사랑과 분노 등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캐서린의 결혼을 보고 벽에 머리를 찣는 수고도, 복수로만 감정을 갈아먹는 일도 없었을 거다. 이는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 농원에만 한정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살면서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쌓일 때가 수도 없이 찾아온다. 히스클리프처럼 대처했다간 사회는 짐승들이 들끓는 정글이 될 것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순식간에 읽어나갔다. <폭풍의 언덕>의 주요 인물은 캐서린도 히스클리프도 아닌, 하녀 '넬리' 아닐까. 록우드라는 사람이 티티새 지나는 농원(린튼가 가문)에 들러 두 집안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린튼가와 언쇼가의 히스토리는 언쇼가의 하녀였던 넬리를 통해 록우드에게 전달된다. 넬리는 소설 속 화자이자, 두 가문에서 가장 정상적인 언행을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섬뜩한 결말에 치달을 때즈음 드는 생각.
 '넬리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일까?' 모든 인물을 비정상적으로 언급하는 것에 비추어볼 때, 넬리의 성격을 드러내는 연출 방식에 따라 소설은 식스센스 버금가는 반전스릴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브론테의 글 답다. 에밀리 브론테가 <폭풍의 언덕>으로 현세에 읽힌다면 언니 샬롯 브론테는 <제인에어>로 기억되고 있다. 브론테가 아이들은 영국 북부 요크셔의 황량한 고원에서 아일랜드인 목사를 아버지로 두고 언니, 동생과 이야기를 짓고 읽어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목사라는 절제된 직업, 폭풍의 언덕을 닮은 요크셔 지방. 그 안에서 만들어진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미친사랑. 정도를 지키는 종교집안에서 만들어낸 비정상적 광기의 서사는 독자에게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간다.  <폭풍의 언덕> 저자 에밀리 브론테는 폐병으로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자신이 만들어낸 캐서린의 죽음을 그대로 따르려는 듯, 의사의 진찰을 거부한 채로 병마를 받아들인다. 삶과 이야기가 연결된 서사가 <폭풍의 언덕> 안팎에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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