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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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범하는 기억 속에 깃든 질문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어쩌면 그것 때문에 삶을 버텨왔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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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와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꾹꾹 눌러담아 쓴 든한 첫 두 챕터를 읽고 나니, 그보다 더 마음에 남은 것은 '시간'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첫 챕터에서 저자는 광대한 우주의 역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데, 나는 상상되지 않는 것을 상상하려 애쓰느라 머리에 긴장을 잔뜩 부여해야 했다. 그 긴장이 떠오르게 한 우주의 심상은 한없이 고요하고 경이로웠고, 일상에 내팽개쳐진 패배자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 긴장은 저자가 흘러간 시간을 언급할 때 탁하고 풀리며 아득히 멀어졌다. 10^-12초, 1초, 그리고 38만년. 너무나 작고, 또 너무나 큰 시간의 흐름을 의식할 때, 우주의 심상은 이미지를 지우고 감정만이 '시간'에 들러붙었다. 시간, 과연 시간이란 무엇인지.

 

 두 번째 챕터에서 범우주적 동질성,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성립하는 코스모스적 질서를 목격할 때, 시간에 대한 질문은 구체화되었다. 뉴턴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 사실은 지구뿐 아니라 목성, 심지어 태양계 너머의 은하까지 동일한 질서 체계까 지배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과거에도, 그리고 끝없이 펼쳐질 미래에도 동일한 체계가 우주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상식에 가깝지만,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 사실의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이 상황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거대한 영원과 사라지는 하루 중, 무엇이 더 가치있는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사실 예술은 짧다. 긴 것은 오직 물리법칙 뿐이다. 이러한 물리법칙의 범우주성은 경이롭다.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아름답다. 어찌보면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은 영원히 남는 보편성이 아니라 한없이 짧은 순간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인간 또한 순간에 매달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커트 코베인이 죽기 전에 남겼듯,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순간에 타오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저자는 커피 위에 올려진 휘핑크림의 사례를 들며 범우주적 동질성을 찬양한다. 하지만 휘핑크림이 커피 위에 뜬다는 사실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그 날만 나올 수 있는 커피의 맛일지 모른다. 너무나 많은 우연에 기대는 인간사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의 추구가 더 아름답다는 말을 쉽사리 부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영원 대 하루라는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 사이에 눌린 채로 살아가는 고행자라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미를 노래하는 베토벤의 선율에 감명 받다가도 오직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짐 모리슨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애매하며 불행하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영원을 순간으로, 혹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며 불행을 위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자와 별개로 기만자들 또한 있다. 영원이 아닌 것을 영원처럼 추구하고, 순간이 아닌 것을 순간처럼 추구하는 사람들. 이 사회에 가장 많은 것은 이러한 기만자들이다. 이러한 기만자들은 분명히 혐오스럽지만, 이들과는 구분되는 위로자들의 확고한 신념을 깎아내릴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위로와 기만을 모두 다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길이다.


p.s. <유랑극단>, <안개 속의 풍경> 등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중 <영원과 하루(1998)>라는 영화가 있더라. 명성은 자주 들은 감독이지만 한 번도 이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이 시간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냈을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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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에세이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생각의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재간)>에 실린 두 번째 글, ‘사랑과 우정’에 깊은 통찰력이 실려 있어 조금 묶어놓는다. 기본적으로는 말 그대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우정의 차이에 대한 두 페이지짜리 짧은 글이지만,  투르니에가 ‘현대 사회’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은 이것을 현대 사회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여기서 사랑이 우정보다 우월하다는 시각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생각해보면 자기계발서 시장이 축소되긴 했어도 아직까지 ‘성공’만큼이나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인데, 이제는 정말로 그에 앞서 상호 존중을 근거로 하는 ‘우정’을 강조해야 하지 않나 싶다. 공자와 같은 옛 성현의 말씀이 오늘날 의미를 갖는 지점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정과 사랑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상호성이 없는 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우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우정을 느낄 수 없다.(…..) 반면에 사랑은 서로 나눌 수 없다는 불행으로부터 자양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 P22

경멸은 우정을 죽여버린다. 반면에 사랑의 격정은 사랑하는 대상의 어리석음, 비겁함, 천박함 따위에 관심이 없다. - P23

사실 현대 서구 문명은 사랑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걸고 있다. 이 덧없는 열정 위에다 어떻게 감히 한 생애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라 브뤼예르는 일찍이 "우정은 시간이 갈 수록 굳건해지지만, 사랑은 점점 더 약해진다"라고 말한 바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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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8월에 출간된 물리학책 중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역시 리 스몰린이 쓴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이다. 2013년에 출간된 <Time Reborn: From the Crisis in Physics to the Future of the Universe>을 번역한 것이라고 하는데 심지어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에도 올라와 있다. 보아하니 '시간에 대한 연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는 평가는 과장된 것일지 모르지만, 이 책이 물리학에서의 '시간'을 파악하는데 더없이 유용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Time Reborn(시간의 재탄생)>이라는 원제를 가진 이 책은 최신 물리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연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여겨져 왔으며,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에 관한 논의를 가장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추하고 불편하고 시간에 얽매인 듯 보이는 인간 세계를 순수하고 비시간적인 진리의 세계로 바꾸고자 열망"하며 물리학자가 된 저자가 20년의 연구 끝에 믿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돌아서기까지 어떤 발견들이 있었을까. 저자가 '여는 글'을 통해 "물리학 또는 수학에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는 것을 강조하니, 혹여 물리학 책이 처음이더라도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잠시 멍해졌다면 이 책을 권한다. '                과학 MD 권벼리
















'편집장의 선택'에서는 리 스몰린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등을 저술한 카를로 로벨리의 '맞수'로 칭하는데, 정작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편집장의 선택에 오른 적이 없으니 그 동안 얼마나 현대물리학 분야의 위상이 높아진 건지 짐작이 간다. 


 또한 전에 읽었던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과 로벨리의 책들을 떠올려 볼 때 둘의 글쓰기 스타일은 '맞수'라고 불릴만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둘의 가장 비슷한 점은 물리학적 발견에 앞서 세상을 탐구하기 위한 철학적 기준점을 세워놓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세계는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와 같은 명제 말이다. 이것은 고리양자중력의 가장 기본 철학며 두 사람의 책 모두에 중요하게 다뤄진다. 또한 사적인 이야기의 비중도 꽤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둘은 모두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의 과학도의 길을 걷지 않았고, 그러한 점이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 때문에 책에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스몰린이 조금 더 브라이언 그린에 가깝게, 물리학에 기울어 있다면 로벨리는 철학적으로 더욱 기운 것이 차이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리 스몰린은 현대물리학 책에서 자주 등장하던 이름이기도 하고(블랙홀에서 우주가 탄생했다는 그의 이론은 브라이언 그린, 리처드 고트의 책에서 한 단락에 걸쳐 설명되며, 카를로 로벨리는 자신의 거의 모든 책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엣지 시리즈',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 등에 모두 참여한 사람이기에 그의 단독 저작이 국내에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하나 밖에 출간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아인슈타인처럼 양자역학하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등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으니 이는 여러가지로 반가운 일이겠다. 첫 번째는 그의 과학적 업적들을 훨씬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로 그가 가진 사상들을 그의 육성으로 들으며 다른 학자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른다고 누군가 말할 때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학자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때 이는 급진적인 주장이 된다. 주류 물리학에서 시간은 '환상'이며 물리 법칙은 시간 바깥에 있는 절대 불변의 진리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를 대변하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가 자신의 '맞수'라고 공언한 이가 있다. 양자중력 연구의 석학, 리 스몰린이 "시간의 흐름은 본질적이고 실재하는 것이며, 비시간적인 진리에 대한 희망은 신화"라고 외치며 그간의 단단한 믿음에 균열을 낸다.'             과학 MD 권벼리


편집장의 선택은 아마도 두 번째 이유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시간'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대한 스몰린의 생각과 로벨리의 생각의 대조에 대해 말이다.















 


 그런데 조금 의문가는 점이 있다. 권 MD는 카를로 로벨리와 그의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가 '시간은 환상'이라는 주류 물리학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썼는데 카를로 로벨리는 본질적으로 비주류 물리학자가 아니던가? 그가 연구하는 분야는 초끈이론과 별개로 양자 중력을 탐구하는 '고리양자중력' 이론으로 물리학에서 분명히 비주류에 속한다. 그는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서 초끈이론을 대놓고 까기도 했으며 주류 물리학자들이 갖는 수학적 미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분명히 스몰린과 같은 비주류 물리학자이다. 그들의 연구를 담은 책 <퀀텀 스페이스>에서도 그들은 '고리양자중력'이라는 키워드로 한꺼번에 묶인다. 그런데 왜 시간은 주류라는 것일까?
















 사실 이 부분은 인간의 언어가 갖고 있는 구조적 한계로 인해 존재론이 불완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환상'이라는 명제에 주류 물리학자들과 로벨리는 모두 동의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다르다. 대표적인 주류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이 <우주의 구조> 등에서 내비치는 관점은 시공간에 대한 실재론이다. 다시 말해 주류 물리학자들에게 '시간이 환상'이라는 말은 모든 사건이 한꺼번에 실재한다는 블록우주이론에 가깝다.

 

 반면 로벨리는 라이프니츠의 후예이다. 시공간을 온전히 관계로만 기술하려 하는 반실재론자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시간이 환상'이라는 말은 그저 사건들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둘은 언어적 한계로 인해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대표적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각주에서, 주류 물리학의 시공간 해석을 기초로 한 철학자 퍼트넘의 안드로메다 논증을 비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스몰린과 입장이 상반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스몰린의 주장은 실험물리학자 리처드 뮬러가 <나우: 시간의 물리학>에서 한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시공간의 흐름은 실재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 그것이 그의 가치관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로벨리 대 스몰린을 주류 대 비주류로 단정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모두 다 비주류인데,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실 주류 대 비주류로 비교하기 가장 좋은 예시는 스티븐 호킹 대 로저 펜로즈가 아닐까. 그들은 정말 쌍벽을 이루면서 주류와 비주류를 대표한다.

 대부분의 주류 학자(끈이론, 표준모형...) 들과 비주류 학자(고리양자 중력, 다세계 해석.......)이 특정한 이론에 천착하는 반면 호킹과 펜로즈는 가장 궁극적인 질문에서 출발했고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호킹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빅뱅과 블랙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엮었으며 펜로즈는 수학부터 뇌과학까지 넘나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론은 이론 자체의 의미보다는 근본 조건의 설정 정도로써 의미가 매우 큰 것 같다. 펜로즈의 경우 '스핀 네트워크'라는 본인만의 계산법을 발명해 양자 중력을 하는 모든 이에게 도구를 제공해 주었다. 스몰린과 로벨리의 책을 보면 펜로즈는 거의 그들에게 '스승'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다.

 호킹이 창안한 '호킹 복사' 이론은 모든 양자 중력 이론이 설명해야 할 시험대이다. 그는 자신만의 양자 중력 이론을 개척하지는 않았지만 상대론과 양자론이 합쳐지는 지점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고로 모든 양자 중력 이론은 호킹 복사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린과 로벨리, 스몰린 모두 자신의 책에서 호킹 복사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을 다룬 책은 호킹과 펜로즈의 공동 저술이 될 것이다. 펜로즈의 노벨상 소식에 따라 재출간된 두 책, <시간과 공간에 관하여>와 <우주 양자 마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펜로즈의 책들은 대부분의 교양과학서 독자들에게 난이도의 끝판왕에 속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가장 도전할 엄두가 안 나는 책들이 펜로즈의 책들이다.



 












 그러나 그들만이 시공간의 본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케우치 가오루의 <싸우는 물리학자>처럼 가볍게 다루는 수준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와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의 저자 짐 홀트는 과학자가 아님에도 TED 강연에서 과학을 논평했다. 나는 이 지점이 과학 문화 형성의 가장 큰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TV 프로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와 김상욱 교수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다. 김상욱 교수가 과학의 교양화를 주장하자 김영하 작가는 과학 그 자체가 가진 사실검증성 때문에 힘들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나는 최재천 교수의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으로 <이기적 유전자>, <사회 생물학> <우연과 필연>을 자주 거론한다.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은 애초부터 경계가 모호하니 그렇다 치자. 교양서인 <이기적 유전자>와 교과서인 <사회 생물학>이 '연구자에게' 어떻게 같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저술'이라는 행위의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전문적인 논문을 많이 쓴다고 하더라도 책의 저술은 특별한 경험이 된다는 것이다. 논문과 달리 책은 (그것이 전문서적이든 교양서이든 상관없이) 자신 이론의 모든 것을 꺼내놓아야 한다. 모든 사실을 꺼내란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맥락을 꺼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찰력이 뛰어난 과학 교양서는 훌륭한 과학 전문서에 비견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기적 유전자'가 그 대표적인 예다. 설령 그것이 윌리엄 해밀턴의 이론을 그대로 썼다고 할지라도, 책을 통해 우리는 도킨스의 맥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권 MD의 글이 전체적으로 탁월한 것도 그 지점을 짚었기 때문이다. 그는 '편집장의 선택'에서 과학책을 일종의 사상서처럼 다루었다.















 아무튼 그렇다면 과학을 교양으로써 취급하면서 '수다'를 떠는 것은 가능해진다. 책, 기사, 영상 등 다양한 과학 전달 매체의 맥락을 파악함으로써 말이다. 비로소 과학이 교양으로써 제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 과학과 인문학은 교양 앞에 평등해진다. 이것이 과학 대중화의 궁극적 목표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 이러한 수준 높은 과학책들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단순히 수준이 높아서 그렇다기보다는 여러 책들을 가지고 비교하면서 읽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시간'에 대한 주제로 물리학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 로벨리의 책을 참고할 수도, 뮬러의 책을 참고할 수도, 스몰린의 책을 참고할 수도, 그린의 책을 참고할 수도, 펜로즈의 책을 참고할 수도, 호킹의 책을 참고할 수도 있다. 그들 모두는 맥락이 다르다. 이제 논쟁이 가능해진다.
















 7년 전 쯤 잡지 <스켑틱>, <에피> 등의 창간과 더불어 김상욱, 김대식, 김범준 등 다양한 과학 저자들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한국 과학독서의 르네상스가 왔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양적으로는 풍성해졌을지 몰라도 질적으로 그들이 과연 이전의 장대익, 이강영, 정재승 등보다 나은 지 모르겠었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다양한 입장의 질 좋은 과학책들이 수입되고 있는 지금,

카를로 로벨리, 프랭크 윌첵, 션 캐롤 등의 저자가 소개된 뒤부터 지금까지의 몇년.

 

지금이 바로 과학 독서의 전성기다. 한국 과학 대중화는 이 지점에서 큰 진보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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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캘채 2022-09-08 22: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mini74님도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랴윤 2024-01-02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책을 찾아보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그동안 쓰신 글들을 오랫동안 찬찬히 읽고 있습니다. 깊은 영감이 되어요.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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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아주 뛰어난 책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경험과 감정이 나를 끊임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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