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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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르발 남작의 성>은 레고와 같은 소설이다. <그녀의 매듭>이나 <그림자 박제>가 마치 무의식이 폭발하거나 질주하듯이 전개되는 것에 비해 <퀴르발 남작의 성>은 매우 치밀한 공학적 재미를 자랑한다. 이는 주제를 훨씬 다차원적이고 입체적으로 확장하기 위함이다.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단편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총 5개다.


1.1697년 실제 이야기

2.1897년 자네트 페로 할머니의 동화 <겂 없는 장과 퀴르발 남작의 성>

3.1932년 미셸 페로의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

4.1953년 에드워드 피셔의 영화 <퀴르발 남작의 성>

5.2004년 나카자와 사토시의 영화 <도센 남작의 성>


 이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세 번째 것과 네 번째 것, 즉 미셸 페로의 소설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에드워드 피셔 감독의 영화이다. 

 이 작품에서 드러난 소설과 원작의 큰 차이는 결말이다. 소설의 경우 하퍼 부부와 퀴르발 남작 부부가 다 같이 하퍼 부부의 딸을 요리해 먹는 것이 결말인 반면 영화에서는 하퍼 부부가 퀴르발 남작에게 저항하고, 퀴르발 남작이 최후를 맞는 것이 결말이다.

 나카자와 사토시 감독은 이를 두고 에드워드 피셔 감독의 영화에서 인간은 욕망에 매몰되는 존재보다는 이를 극복하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기에 결말을 수정했을 것이라 했으며 소설의 결말이 더욱 현대적인 결말이라 평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영화 제작자와 피셔 감독의 대화를 통해 이를 뒤집어 재미를 준다. 사실 에드워드 피셔 감독 또한 소설의 결말을 수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페로와 피셔, 나카자와 이 셋이 공통적으로 생각한 결말이 담고 있는 소설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는 나카자와 감독이 이미 언급했다. 바로 '욕망'이라는 키워드다.

 미셸 페로는 편집장과의 대화에서 이야기 세상이 현실보다 더욱 생기있었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의 경우 아직 자아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원초적 욕망이 담겨있는 퀴르발 남작의 이야기가 더욱 생기있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장한 후에도 퀴르발 남작은 페로의 '무의식을 배회하는 유령'으로 남아 있었다. 이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욕망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페로는 퀴르발 남작을, 아니 욕망을 다시 소환한 것일까? 가장 기본적인 욕망들, 이를테면 인육을 먹는 식욕이나 할리우드 문법 속에 숨어있는 성욕 등은 모두 생존과 연결된다. 또 이러한 생존은 다시 실존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즉 미셸 페로는 '살고 싶다'라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도대체 어떠한 현실이 미셸 페로에게 '살고 싶다'라는 감정을 불어넣었을까? 나카자와가 말했듯이 1932년은 미국이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에 응수하듯 페로는 자본주의나 대공황을 가볍게 넘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것이 가볍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페로는 대공황 전까지 기득권층이였을 것이다. 대공황이 발생한 가운데 자신에게 회의가 들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획득하고 싶다는 생각이 퀴르발 남작을 불러냈을 것이다.

  이러한 '살고 싶다'라는 감정은 현대에도 적용된다. 이 작품은 욕망을 다루는 태도를 1993년의 대학수업으로, 2000년의 논문으로, 2005년의 애틀랜타 사건으로, 2006년의 블로그로 확장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주목해 볼 만한 것은 2005년의 애틀랜타 사건이다. 작가는 애틀랜타 사건을 통해 미셸 페로의 고민이 현대인들에게도 있다고 지적한다.


'살고 싶다'는 감정.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도 문득 퀴르발 남작을 꺼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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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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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제목부터 우리의 상식에 어긋난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니? 여기 흐르고 있지 않은가? 과연 그럴까? 과학이 발전하며 인류는 수많은 상식들이 깨지는 것을 보아왔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식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부수며 시작한다. 먼저 로벨리는, 흔히 알려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용하여 유일하고 절대적인 시간이 있다는 우리의 상식을 깨뜨린다. 그러나 이는 이미 많은 교양과학서에서 다루는 내용이며 아주 새로울 것은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럴까? 로벨리는 그 부분에 관해서 크게 다루지 않고 넘어간다.

 상대성이론에 의해 절대적인 시간이 깨졌다 할지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남아있는 시간의 특성이다. 그것이 흔히 '시간의 화살'이라 부르는 것으로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즉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벨리는 인간이 사물을 희미하게만 보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는 이미 물리학자 볼쯔만이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물리학의 거의 모든 법칙은 시간에 대하여 가역적이다. 즉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는다. 뉴턴의 고전 물리학 뿐만 아니라 슈뢰딩거나 디랙의 양자 물리학 또한 그렇다. 물리학에서 시간에 대해 비가역적인, 즉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법칙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이 바로 열역학 제 2법칙이다. 그것은 열은 오직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즉 한 방향으로만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발견한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열이 순행하는 것을 측정하는 양을 정의하고, 그것을 엔트로피라 불렀다. 다시 말하면 이 엔트로피가 결단코 감소할 수 없고, 증가할 수 만 있다는 것이 열역학 제 2법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엔트로피는 무조건 증가만 하는 것일까? 볼쯔만은 당시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분자와 원자의 존재를 통해 이를 알아낸다. 분자들이 계속해서 동요하며 주변 분자들에 충격을 가하고, 이 동요가 확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운 물체와 뜨거운 물체가 접촉하면 차가운 물체가 점점 뜨거워지게 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열 요동은 카드 한 묶음이 계속 섞이는 것과 같다. 한 번 섞인 카드는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계속 섞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엔트로피라는 것은 분자들의 무질서도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었다. 이는 당연한 것이기는 하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한다는 말은 과거에는 엔트로피가 훨씬 낮았다는 것 아닌가? 왜 과거에는 엔트로피가 낮았을까? 볼쯔만과 로벨리는,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벨리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한쪽은 빨강색으로, 한쪽은 검정색으로 정돈되어 있는 카드 뭉치를 섞는다고 하자. 당연히 섞기 전이 질서 있고 특별한 상태이며 섞은 후는 무질서하고 특별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는 색상을 기준으로 했을 때이다. 어떤 구성이더라도 기준을 다르게 잡으면 특별해질 수 있다. 만약 처음부터 섞여 있는 상태에서 앞에 5장을 외워둔 다음 섞으면 어떨까? 이 경우에는 섞기 전이 특별한 상태이다. 우리가 색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은, 색상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의 희미한 시각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이와 같다. 미시적인 구조를 보지 못하고 거시적인 구조만 보는 인간의 희미한 시각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었다는 것이 설명이 된다. 우리의  희미한 시각으로 보았을 때만 낮았던 것이다. 이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인간의 희미한 시각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이 사라진 세상은 어떤 것일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 아무런 변화 없이 존재하며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블록 우주와 같은 세상일까? 이는 아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 구조가 순간들의 단일한 연속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 변화가 허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로벨리의 전공분야인 루프양자중력이론의 방정식에는 시간의 변수가 없다고 한다. 세상은 단지 수많은 입자와 장들의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일 뿐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초 물리학의 시간은 세상에 없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1부와 2부의 내용이다. 마지막 3부에서는 우리가 어찌하여 시간을 만들어내게 되었으며, 시간의 원천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탐구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에 한발짝 더 나아간다. 로벨리는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가 세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그 중 세 번쨰 것이 바로 '기억'이다. 우리는 매순간의  '기억'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엮으며, 이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데, 이러한 미래 예측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뇌가 이러한 구조를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간이란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기억과 예측을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이 책의 요지는 결국 우주는 인간의 시간 속에 살지 않고 세상은 온갖 사건과 관계들의 네트워크일 뿐이며, 시간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로 야심이 큰 책이며, 그 야심을 잘 드러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색에 빠지며, 이 책을 서재에 꽂아넣는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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