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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와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꾹꾹 눌러담아 쓴 든한 첫 두 챕터를 읽고 나니, 그보다 더 마음에 남은 것은 '시간'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첫 챕터에서 저자는 광대한 우주의 역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데, 나는 상상되지 않는 것을 상상하려 애쓰느라 머리에 긴장을 잔뜩 부여해야 했다. 그 긴장이 떠오르게 한 우주의 심상은 한없이 고요하고 경이로웠고, 일상에 내팽개쳐진 패배자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 긴장은 저자가 흘러간 시간을 언급할 때 탁하고 풀리며 아득히 멀어졌다. 10^-12초, 1초, 그리고 38만년. 너무나 작고, 또 너무나 큰 시간의 흐름을 의식할 때, 우주의 심상은 이미지를 지우고 감정만이 '시간'에 들러붙었다. 시간, 과연 시간이란 무엇인지.

 

 두 번째 챕터에서 범우주적 동질성,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성립하는 코스모스적 질서를 목격할 때, 시간에 대한 질문은 구체화되었다. 뉴턴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 사실은 지구뿐 아니라 목성, 심지어 태양계 너머의 은하까지 동일한 질서 체계까 지배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과거에도, 그리고 끝없이 펼쳐질 미래에도 동일한 체계가 우주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상식에 가깝지만,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 사실의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이 상황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거대한 영원과 사라지는 하루 중, 무엇이 더 가치있는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사실 예술은 짧다. 긴 것은 오직 물리법칙 뿐이다. 이러한 물리법칙의 범우주성은 경이롭다.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아름답다. 어찌보면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은 영원히 남는 보편성이 아니라 한없이 짧은 순간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인간 또한 순간에 매달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커트 코베인이 죽기 전에 남겼듯,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순간에 타오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저자는 커피 위에 올려진 휘핑크림의 사례를 들며 범우주적 동질성을 찬양한다. 하지만 휘핑크림이 커피 위에 뜬다는 사실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그 날만 나올 수 있는 커피의 맛일지 모른다. 너무나 많은 우연에 기대는 인간사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의 추구가 더 아름답다는 말을 쉽사리 부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영원 대 하루라는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 사이에 눌린 채로 살아가는 고행자라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미를 노래하는 베토벤의 선율에 감명 받다가도 오직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짐 모리슨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애매하며 불행하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영원을 순간으로, 혹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며 불행을 위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자와 별개로 기만자들 또한 있다. 영원이 아닌 것을 영원처럼 추구하고, 순간이 아닌 것을 순간처럼 추구하는 사람들. 이 사회에 가장 많은 것은 이러한 기만자들이다. 이러한 기만자들은 분명히 혐오스럽지만, 이들과는 구분되는 위로자들의 확고한 신념을 깎아내릴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위로와 기만을 모두 다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길이다.


p.s. <유랑극단>, <안개 속의 풍경> 등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중 <영원과 하루(1998)>라는 영화가 있더라. 명성은 자주 들은 감독이지만 한 번도 이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이 시간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냈을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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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에세이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생각의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재간)>에 실린 두 번째 글, ‘사랑과 우정’에 깊은 통찰력이 실려 있어 조금 묶어놓는다. 기본적으로는 말 그대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우정의 차이에 대한 두 페이지짜리 짧은 글이지만,  투르니에가 ‘현대 사회’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은 이것을 현대 사회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여기서 사랑이 우정보다 우월하다는 시각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생각해보면 자기계발서 시장이 축소되긴 했어도 아직까지 ‘성공’만큼이나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인데, 이제는 정말로 그에 앞서 상호 존중을 근거로 하는 ‘우정’을 강조해야 하지 않나 싶다. 공자와 같은 옛 성현의 말씀이 오늘날 의미를 갖는 지점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정과 사랑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상호성이 없는 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우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우정을 느낄 수 없다.(…..) 반면에 사랑은 서로 나눌 수 없다는 불행으로부터 자양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 P22

경멸은 우정을 죽여버린다. 반면에 사랑의 격정은 사랑하는 대상의 어리석음, 비겁함, 천박함 따위에 관심이 없다. - P23

사실 현대 서구 문명은 사랑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걸고 있다. 이 덧없는 열정 위에다 어떻게 감히 한 생애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라 브뤼예르는 일찍이 "우정은 시간이 갈 수록 굳건해지지만, 사랑은 점점 더 약해진다"라고 말한 바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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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8월에 출간된 물리학책 중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역시 리 스몰린이 쓴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이다. 2013년에 출간된 <Time Reborn: From the Crisis in Physics to the Future of the Universe>을 번역한 것이라고 하는데 심지어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에도 올라와 있다. 보아하니 '시간에 대한 연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는 평가는 과장된 것일지 모르지만, 이 책이 물리학에서의 '시간'을 파악하는데 더없이 유용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Time Reborn(시간의 재탄생)>이라는 원제를 가진 이 책은 최신 물리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연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여겨져 왔으며,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에 관한 논의를 가장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추하고 불편하고 시간에 얽매인 듯 보이는 인간 세계를 순수하고 비시간적인 진리의 세계로 바꾸고자 열망"하며 물리학자가 된 저자가 20년의 연구 끝에 믿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돌아서기까지 어떤 발견들이 있었을까. 저자가 '여는 글'을 통해 "물리학 또는 수학에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는 것을 강조하니, 혹여 물리학 책이 처음이더라도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잠시 멍해졌다면 이 책을 권한다. '                과학 MD 권벼리
















'편집장의 선택'에서는 리 스몰린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등을 저술한 카를로 로벨리의 '맞수'로 칭하는데, 정작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편집장의 선택에 오른 적이 없으니 그 동안 얼마나 현대물리학 분야의 위상이 높아진 건지 짐작이 간다. 


 또한 전에 읽었던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과 로벨리의 책들을 떠올려 볼 때 둘의 글쓰기 스타일은 '맞수'라고 불릴만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둘의 가장 비슷한 점은 물리학적 발견에 앞서 세상을 탐구하기 위한 철학적 기준점을 세워놓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세계는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와 같은 명제 말이다. 이것은 고리양자중력의 가장 기본 철학며 두 사람의 책 모두에 중요하게 다뤄진다. 또한 사적인 이야기의 비중도 꽤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둘은 모두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의 과학도의 길을 걷지 않았고, 그러한 점이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 때문에 책에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스몰린이 조금 더 브라이언 그린에 가깝게, 물리학에 기울어 있다면 로벨리는 철학적으로 더욱 기운 것이 차이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리 스몰린은 현대물리학 책에서 자주 등장하던 이름이기도 하고(블랙홀에서 우주가 탄생했다는 그의 이론은 브라이언 그린, 리처드 고트의 책에서 한 단락에 걸쳐 설명되며, 카를로 로벨리는 자신의 거의 모든 책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엣지 시리즈',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 등에 모두 참여한 사람이기에 그의 단독 저작이 국내에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하나 밖에 출간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아인슈타인처럼 양자역학하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등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으니 이는 여러가지로 반가운 일이겠다. 첫 번째는 그의 과학적 업적들을 훨씬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로 그가 가진 사상들을 그의 육성으로 들으며 다른 학자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른다고 누군가 말할 때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학자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때 이는 급진적인 주장이 된다. 주류 물리학에서 시간은 '환상'이며 물리 법칙은 시간 바깥에 있는 절대 불변의 진리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를 대변하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가 자신의 '맞수'라고 공언한 이가 있다. 양자중력 연구의 석학, 리 스몰린이 "시간의 흐름은 본질적이고 실재하는 것이며, 비시간적인 진리에 대한 희망은 신화"라고 외치며 그간의 단단한 믿음에 균열을 낸다.'             과학 MD 권벼리


편집장의 선택은 아마도 두 번째 이유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시간'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대한 스몰린의 생각과 로벨리의 생각의 대조에 대해 말이다.















 


 그런데 조금 의문가는 점이 있다. 권 MD는 카를로 로벨리와 그의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가 '시간은 환상'이라는 주류 물리학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썼는데 카를로 로벨리는 본질적으로 비주류 물리학자가 아니던가? 그가 연구하는 분야는 초끈이론과 별개로 양자 중력을 탐구하는 '고리양자중력' 이론으로 물리학에서 분명히 비주류에 속한다. 그는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서 초끈이론을 대놓고 까기도 했으며 주류 물리학자들이 갖는 수학적 미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분명히 스몰린과 같은 비주류 물리학자이다. 그들의 연구를 담은 책 <퀀텀 스페이스>에서도 그들은 '고리양자중력'이라는 키워드로 한꺼번에 묶인다. 그런데 왜 시간은 주류라는 것일까?
















 사실 이 부분은 인간의 언어가 갖고 있는 구조적 한계로 인해 존재론이 불완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환상'이라는 명제에 주류 물리학자들과 로벨리는 모두 동의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다르다. 대표적인 주류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이 <우주의 구조> 등에서 내비치는 관점은 시공간에 대한 실재론이다. 다시 말해 주류 물리학자들에게 '시간이 환상'이라는 말은 모든 사건이 한꺼번에 실재한다는 블록우주이론에 가깝다.

 

 반면 로벨리는 라이프니츠의 후예이다. 시공간을 온전히 관계로만 기술하려 하는 반실재론자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시간이 환상'이라는 말은 그저 사건들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둘은 언어적 한계로 인해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대표적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각주에서, 주류 물리학의 시공간 해석을 기초로 한 철학자 퍼트넘의 안드로메다 논증을 비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스몰린과 입장이 상반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스몰린의 주장은 실험물리학자 리처드 뮬러가 <나우: 시간의 물리학>에서 한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시공간의 흐름은 실재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 그것이 그의 가치관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로벨리 대 스몰린을 주류 대 비주류로 단정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모두 다 비주류인데,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실 주류 대 비주류로 비교하기 가장 좋은 예시는 스티븐 호킹 대 로저 펜로즈가 아닐까. 그들은 정말 쌍벽을 이루면서 주류와 비주류를 대표한다.

 대부분의 주류 학자(끈이론, 표준모형...) 들과 비주류 학자(고리양자 중력, 다세계 해석.......)이 특정한 이론에 천착하는 반면 호킹과 펜로즈는 가장 궁극적인 질문에서 출발했고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호킹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빅뱅과 블랙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엮었으며 펜로즈는 수학부터 뇌과학까지 넘나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론은 이론 자체의 의미보다는 근본 조건의 설정 정도로써 의미가 매우 큰 것 같다. 펜로즈의 경우 '스핀 네트워크'라는 본인만의 계산법을 발명해 양자 중력을 하는 모든 이에게 도구를 제공해 주었다. 스몰린과 로벨리의 책을 보면 펜로즈는 거의 그들에게 '스승'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다.

 호킹이 창안한 '호킹 복사' 이론은 모든 양자 중력 이론이 설명해야 할 시험대이다. 그는 자신만의 양자 중력 이론을 개척하지는 않았지만 상대론과 양자론이 합쳐지는 지점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고로 모든 양자 중력 이론은 호킹 복사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린과 로벨리, 스몰린 모두 자신의 책에서 호킹 복사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을 다룬 책은 호킹과 펜로즈의 공동 저술이 될 것이다. 펜로즈의 노벨상 소식에 따라 재출간된 두 책, <시간과 공간에 관하여>와 <우주 양자 마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펜로즈의 책들은 대부분의 교양과학서 독자들에게 난이도의 끝판왕에 속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가장 도전할 엄두가 안 나는 책들이 펜로즈의 책들이다.



 












 그러나 그들만이 시공간의 본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케우치 가오루의 <싸우는 물리학자>처럼 가볍게 다루는 수준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와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의 저자 짐 홀트는 과학자가 아님에도 TED 강연에서 과학을 논평했다. 나는 이 지점이 과학 문화 형성의 가장 큰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TV 프로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와 김상욱 교수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다. 김상욱 교수가 과학의 교양화를 주장하자 김영하 작가는 과학 그 자체가 가진 사실검증성 때문에 힘들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나는 최재천 교수의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으로 <이기적 유전자>, <사회 생물학> <우연과 필연>을 자주 거론한다.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은 애초부터 경계가 모호하니 그렇다 치자. 교양서인 <이기적 유전자>와 교과서인 <사회 생물학>이 '연구자에게' 어떻게 같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저술'이라는 행위의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전문적인 논문을 많이 쓴다고 하더라도 책의 저술은 특별한 경험이 된다는 것이다. 논문과 달리 책은 (그것이 전문서적이든 교양서이든 상관없이) 자신 이론의 모든 것을 꺼내놓아야 한다. 모든 사실을 꺼내란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맥락을 꺼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찰력이 뛰어난 과학 교양서는 훌륭한 과학 전문서에 비견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기적 유전자'가 그 대표적인 예다. 설령 그것이 윌리엄 해밀턴의 이론을 그대로 썼다고 할지라도, 책을 통해 우리는 도킨스의 맥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권 MD의 글이 전체적으로 탁월한 것도 그 지점을 짚었기 때문이다. 그는 '편집장의 선택'에서 과학책을 일종의 사상서처럼 다루었다.















 아무튼 그렇다면 과학을 교양으로써 취급하면서 '수다'를 떠는 것은 가능해진다. 책, 기사, 영상 등 다양한 과학 전달 매체의 맥락을 파악함으로써 말이다. 비로소 과학이 교양으로써 제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 과학과 인문학은 교양 앞에 평등해진다. 이것이 과학 대중화의 궁극적 목표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 이러한 수준 높은 과학책들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단순히 수준이 높아서 그렇다기보다는 여러 책들을 가지고 비교하면서 읽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시간'에 대한 주제로 물리학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 로벨리의 책을 참고할 수도, 뮬러의 책을 참고할 수도, 스몰린의 책을 참고할 수도, 그린의 책을 참고할 수도, 펜로즈의 책을 참고할 수도, 호킹의 책을 참고할 수도 있다. 그들 모두는 맥락이 다르다. 이제 논쟁이 가능해진다.
















 7년 전 쯤 잡지 <스켑틱>, <에피> 등의 창간과 더불어 김상욱, 김대식, 김범준 등 다양한 과학 저자들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한국 과학독서의 르네상스가 왔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양적으로는 풍성해졌을지 몰라도 질적으로 그들이 과연 이전의 장대익, 이강영, 정재승 등보다 나은 지 모르겠었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다양한 입장의 질 좋은 과학책들이 수입되고 있는 지금,

카를로 로벨리, 프랭크 윌첵, 션 캐롤 등의 저자가 소개된 뒤부터 지금까지의 몇년.

 

지금이 바로 과학 독서의 전성기다. 한국 과학 대중화는 이 지점에서 큰 진보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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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캘채 2022-09-08 22: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mini74님도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랴윤 2024-01-02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책을 찾아보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그동안 쓰신 글들을 오랫동안 찬찬히 읽고 있습니다. 깊은 영감이 되어요.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히치콕이었다. 음향 활용이나 카메라 워킹과 같은 연출에서도 히치콕의 영향력이 느껴졌지만, 전체적인 서사와 모티프의 측면에서도 닮아 있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현기증>의 서사에 <이창>의 관음증을 대입한 영화다.

 

 <현기증>과 <헤어질 결심>의 서사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형사의 직책을 가진(혹은 가졌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쫓는다. 그 여자는 남편으로 대표되는 불행한 상황들에서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다(혹은 가담한다). 남자와 여자는 중간에 사랑에 빠지나, 어느 순간 서사가 중단되었다가 둘이 다시 재회하면서 다시금 시작된다. 그리고 남자는 중단 기간 동안 불면으로 고생한다........ 등 <헤어질 결심>의 서사는 <현기증>을 그대로 가져온 측면이 많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사 중간에 지루한 자동차 유리 몽타주가 아닌, 망원경과 창문을 통한 관찰을 대입한다. 카메라를 좌우로, 그리고 특히 줌을 하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이를 통해 남자의 추적은 관음증적인, 어쩌면 에로틱한 분위기를 갖게 된다.


 박찬욱은 이 에로틱함을 사랑으로 치환하고 사랑의 공간을 집어넣는다. 이 점이 히치콕의 영화들과 <헤어질 결심>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헤어질 결심>에는 <현기증>에 없는 '사랑'이 있다. 물론 <현기증>에서도 사랑은 중요한 요소이다. 분명히 두 남녀 주인공은 서로 사랑한다. 그러나 <현기증>에서 사랑은 '동질감'의 은유이다. 결과적으로 <현기증>은 혼돈과 죽음의 거대한 중력에서 버둥거리며 싸워나가는 인간의 생(生)을 그린 작품일 텐데, 여기서 똑같은 한계를 갖고 있는 두 명의 사람은 서로 동질감과 전우애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에서는 사랑으로 은유된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의 사랑은 완벽한 사랑이다. 사랑에 집중하기 위해 이 영화는 주변의 배경들을 상당 부분 제거시켰다. 얘를 들어 박해일은 불면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현기증>의 제임스 스튜어트처럼 트라우마를 갖고 있지는 않다. 탕웨이 또한 킴 노박처럼 상황에 막연히 끌려다니는 인물 대신 사랑을 위해 주체적으로 범죄를 계획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영화는 '생'에 대한 탐구를 '사랑'에 대한 탐구로 치환한다.


 이러한 '생'과 '사랑'의 차이가 <현기증>과 <헤어질 결심>에서 남자의 정신적 붕괴를 전혀 다르게 보이게 하며, 결과적으로 후반부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절망한 이유는 킴 노박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동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킴 노박과 함께 혼돈의 중력으로부터 이겨내려 했지만만 킴 노박이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며 자신의 노력에 대한 회의감이 든 것이다. 반면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이 붕괴된 이유는 본인이 믿었던 진실이 붕괴되고, 더 나아가 사랑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에 대한 <헤어질 결심>의 관점이 드러난다. 박해일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쫓는다. 그런데 무엇을 쫓는가? 형사라는 직업, 그리고 이야기상으로 볼 때 그가 쫓는 것은 '범인' 혹은 '진실'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다르게 말한다. 상술했던 관음증적인 카메라 워크부터 해서 수많은 시점 쇼트들은 그가 쫓는 것을 탕웨이라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헤어질 결심>은 추격의 목적을 '진실'에서 '사람'으로 바꾸는 것, 혹은 방정식의 변수를 상수로 바꾸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면 진정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히치콕은 '사람'을 이루는 것을 알베르 카뮈가 이야기할 법한 영웅주의적 투쟁으로 이야기했지만 박찬욱은 훨씬 더 따뜻한 '사랑'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재빠르게 공간을 넘나드는 교차편집, 그리고 주인공의 추리나 상상을 사실처럼 연출한 것도 그 때문이다. 관계와 사랑을 통해서 박해일은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된다.


 이 관점으로 전반부를 다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박해일은 형사로써 탕웨이를 쫓는다. 그러나 그러한 추격은 '진실'과 '사람' 사이에 애매한 위치를 점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사랑'이 성사되면서 '진실'은 온전히 '사람'으로 바뀐다. 이는 박해일의 존재 증명이기도 한 것이다. 박해일은 제임스 스튜어트와 같은 트라우마는 없지만 대신에 기계적인 성관계를 되풀이하며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그랬던 박해일이 '사랑'을 통해서 존재 증명을 하는 것이다. 이 떄 카메라의 시점 쇼트도 멈추고 둘은 풀샷으로 찍힌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진실이 드러나면서, 진실 대 사랑 문제가 다시금 박해일에게 수면위로 떠오른 것이다. 여기서 사랑으로 다져진 그의 존재는 다시 붕괴할 수밖에 없다(이 때 카메라는 줌 아웃을 한다).


 13개월이 지나고 그가 다시 탕웨이를 만났을 때, 그는 이제 사랑을 거부한다. 존재가 붕괴되는 경험을 다시 하기보다는 그저 현재의 폐허에 머무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반대로 진실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어찌할 것인가? 박해일은 정반대의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둘은 사실상 같은 오류이다. 하나는 방정식에 틀린 상수를 대입했다면, 한 쪽은 맞는 상수를 대입했을 뿐이다. 결국 둘 다 진실을 사람으로 치환시키는, 사랑의 오류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둘은 오해를 풀고 밤 동안에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것은 오직 밤일 뿐이다. 낮이 되는 순간, 다시금 진실 혹은 현실이 그들을 덮칠 것이고, 그들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에 <현기증> 엔딩의 화법을 그대로 빌어와 다시금 질문을 각인시킨다. 바로 여주인공을 죽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기증의 경우) '생'의, (헤어질 결심의 경우) '사랑'의 문제는 영원히 미결로 남는다. 그러한 미결 위에서, 남주인공은 넋 놓고 바라보거나(<현기증>) 괴로워하며 찾는다(<헤어질 결심>).


 어쩌면 사랑의 문제, 그리고 삶의 모든 문제는 영원히 미결일 것이다. 그러한 미결을 해결할 방법은 오직 하나, '헤어질 결심(죽음)'을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한, 살아있는 한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미결로 가득찬 세계 위에서, 파도 위에서, 안개 속에서 끊임없이 찾으려 하는 존재다, 라고 이 영화는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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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티유 뷔르니아의 만화 <양자 세계의 신비>를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던 동기는 기묘한 양자 세계를 어떻게 그려낼까에 대한 궁금증에서였다. 양자역학에 관한 만화는 사실 상당수 나와있지만(<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닐스 보어>, <퀀텀>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대부분 그것이 탄생된 과학사적 맥락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만화는 표지와 제목에서 풍기는 인상이 마치 양자 세계를 직접 그려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뇌 속의 신경계를 재치 있게 그려낸 만화 <뉴로코믹>처럼 말이다.



 그러나 만화를 읽으면서 그 기대는 깨졌다. 이 만화 또한 양자역학의 역사를 다루는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심지어 설명을 그렇게 잘 한 것 같지도 않았다. 양자역학 만화책 중 가장 읽기 힘들고 어려웠다. 감수를 맡은 김상욱 교수는 이 책을 '만화라면 양자역학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을까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이라고 했지만 차라리 그의 책이 훨씬 더 양자역학에 접근하기에 좋다(특히 '김상욱의 양자공부'는 한국 최고의 과학교양서로 뽑을만큼 잘 쓰여졌다).



  그래서 실망감을 안은 채로 힘들게 이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휴 에버렛의 이야기를 지나 다중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에서, 이를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책을 단순히 양자역학 전달용 만화로 읽어선 안 된다는 것,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과학과 철학의 세계에 관한 선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먼저 이 만화에서 그려내는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주인공이 어느 순간 '접속'해버린 이 세계는 과학자들이 있는 현실세계라고 하기도 힘들고 양자 세계라고 하기도 힘들다. 그것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굉장히 특이한 세계다. 이 세계와 가장 비슷한 세계는 루이스 캐럴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세계다. 실제로 주인공 밥은 앨리스가 토끼굴 속으로 '떨어지듯이' 의자 속으로 '떨어지면서' 이 세계로 들어가고, 앨리스가 같은 장소에서 꿈에서 깨어나듯 똑같이 의자에서 꿈에서 깨어나며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이 부분이 앨리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밥이 접속한 세계에 대해서 조금 더 갈피를 잡을 수 있다. 그 세계는 밥의 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에 밥의 개 '릭'의 죽음이라는 사연과 후반부 다중 세계 해석을 이용해 그 세계에 대한 해석을 확장한다.

 이 작품에서 밥은 앨리스와 달리 어떤 계기로 인해 양자 세계에 접속하게 된다. 동료이자 친구였던 강아지 '릭'의 죽음, 그리고'릭'의 영혼으로부터 온 계시가 양자 세계 여행을 촉발했다. 어찌보면 그는 앨리스보다 길가메시와 더 닮아 있다. 친하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세계의 본질,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구하려 나아간다는 점이 똑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플라톤이나 칸트 같은 철학자 대신 물리학자들을 그 질문의 원동자들로 삼는다. 그리고 그 탐구 끝에서.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을 던져버리고 다세계 해석을 주장한다. 물리학자 숀 캐럴이 <다세계>에서 다세계 해석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의 저자도 그것을 최종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세계 해석은 삶과 죽음에 관해서 매우 중대한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서로 인식하지 않으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인류 전체가 찾아온 삶과 죽음의 문제에 양자역학이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것은 이 책을 읽은 뒤 떠오르게 되는 상념이 아니다. 이 책의 작가는 앞에 밥과 릭의 죽음을 길게 배치하고,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를 책 막판에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이론인 동시에 죽은 이들을 위한 레퀴엠이기도 하다. 그 장면에서 참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감동은 그 위로와 경이로움에서 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철학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여정을 담은 책인 동시에, 철학에서 과학이 어떻게 활용되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 책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책이 교양과학서적 중에서는 굉장히 많다. 스티븐 호킹과 카를로 로벨리를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의 책이 이렇게 실재에 관한 부분을 다룬다. 브라이언 그린, 숀 캐럴, 짐 홀트 등은 직접적으로 본인들의 책에서 과학과 철학의 관계가 끈끈함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상욱 교수 같은 사람이 <김상욱의 과학공부> 같은 책에서 그런 부분을 지적했었다.



  그러나 만화책 중에 그런 책은 거의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책은 오직 하나,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로지코믹스>였다.

 이 책은 수학의 기초를 세우려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노력이 얼마나 처절하게 무너지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러셀은 힐베르트이 견해를 이어받아 수학을 완벽한 체계로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러셀 자신과 그의 제자 비트겐슈타인, 괴델에 의해서 수학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만화의 비범함이 드러나는 부분은 그 것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그것을 러셀의 삶과 엮는 부분이 이 만화를 높은 예술성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러셀은 사실 어린 시절 마주한 광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기초인 수학부터 정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만화는 러셀의 실패를 통해 삶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안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만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교양 만화가 이토록 뛰어난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데에 놀랐었다. 그래픽노블과 만화 예술의 깊이에 대해서는 이제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교앙 만화는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양자 세계의 신비>까지 읽은 지금, 이제 그런 한계가 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양자 세계의 신비> 같은 경우, 그렇게까지 뛰어난 책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교양 만화로써 기본적인 지식 전달의 효과가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것은 아마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저자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로지코믹스> 같은 경우, 굉장히 뛰어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단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세계의 신비>와 <로지코믹스>는 과학과 철학의 융합을 매우 흥미롭게 그려내는 만화다.



 


 이 만화들은 이제 과학 교양만화 또한 깊이와 품격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하는 책들이다. 생각해보면 그냥 일반적인 책들의 경우, 논픽션이 픽션에 비해 위상이 딸리지 않지 않는가? 그래픽노블이 문학의 깊이를 따라잡았다면, 교양만화도 논픽션의 깊이를 따라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제 교양만화도 진화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 또한 보인다. 이 만화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교양만화들이 학습만화의 굴레를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다. 분명 교양만화들이 클래식 논픽션으로 자리잡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그것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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