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꾹꾹 눌러담아 쓴 든한 첫 두 챕터를 읽고 나니, 그보다 더 마음에 남은 것은 '시간'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첫 챕터에서 저자는 광대한 우주의 역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데, 나는 상상되지 않는 것을 상상하려 애쓰느라 머리에 긴장을 잔뜩 부여해야 했다. 그 긴장이 떠오르게 한 우주의 심상은 한없이 고요하고 경이로웠고, 일상에 내팽개쳐진 패배자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 긴장은 저자가 흘러간 시간을 언급할 때 탁하고 풀리며 아득히 멀어졌다. 10^-12초, 1초, 그리고 38만년. 너무나 작고, 또 너무나 큰 시간의 흐름을 의식할 때, 우주의 심상은 이미지를 지우고 감정만이 '시간'에 들러붙었다. 시간, 과연 시간이란 무엇인지.

 

 두 번째 챕터에서 범우주적 동질성,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성립하는 코스모스적 질서를 목격할 때, 시간에 대한 질문은 구체화되었다. 뉴턴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 사실은 지구뿐 아니라 목성, 심지어 태양계 너머의 은하까지 동일한 질서 체계까 지배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과거에도, 그리고 끝없이 펼쳐질 미래에도 동일한 체계가 우주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상식에 가깝지만,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 사실의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이 상황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거대한 영원과 사라지는 하루 중, 무엇이 더 가치있는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사실 예술은 짧다. 긴 것은 오직 물리법칙 뿐이다. 이러한 물리법칙의 범우주성은 경이롭다.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아름답다. 어찌보면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술은 영원히 남는 보편성이 아니라 한없이 짧은 순간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인간 또한 순간에 매달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커트 코베인이 죽기 전에 남겼듯,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순간에 타오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저자는 커피 위에 올려진 휘핑크림의 사례를 들며 범우주적 동질성을 찬양한다. 하지만 휘핑크림이 커피 위에 뜬다는 사실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그 날만 나올 수 있는 커피의 맛일지 모른다. 너무나 많은 우연에 기대는 인간사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의 추구가 더 아름답다는 말을 쉽사리 부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영원 대 하루라는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 사이에 눌린 채로 살아가는 고행자라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미를 노래하는 베토벤의 선율에 감명 받다가도 오직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짐 모리슨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애매하며 불행하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영원을 순간으로, 혹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며 불행을 위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자와 별개로 기만자들 또한 있다. 영원이 아닌 것을 영원처럼 추구하고, 순간이 아닌 것을 순간처럼 추구하는 사람들. 이 사회에 가장 많은 것은 이러한 기만자들이다. 이러한 기만자들은 분명히 혐오스럽지만, 이들과는 구분되는 위로자들의 확고한 신념을 깎아내릴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위로와 기만을 모두 다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길이다.


p.s. <유랑극단>, <안개 속의 풍경> 등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중 <영원과 하루(1998)>라는 영화가 있더라. 명성은 자주 들은 감독이지만 한 번도 이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이 시간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냈을 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