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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퀘이크
커트 보니것 지음, 유정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서구 문학사상 유머의 측면에서 가장 큰 성취를 이룬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카프카일 것이다. 물론 유머는 고대의 우화들에서도 곧잘 사용되던 기법이고, 루이스 캐럴이나 마크 트웨인은 유머의 힘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도했다. 그러나 유머를 완전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카프카다. 의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세계는 무의식이 지배한다. 부조리한 세계는 결코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인간은 벌레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 그 속에서 인간의 실존은 그저 웃기고 가여운 것이다. 이 모든 명제를 희한한 방식으로 입증하는 카프카의 통렬한 유머 감각은 이전의 서구 문학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그리고, 카프카의 자식들이 있다. 20세기 작가들은 카프카의 유머 아래에서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대표적으로 알베르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서문에서 ‘이 에세이에서는 부조리가 결론이 아닌 출발점으로 간주‘된다고 밝힌다. 그리고 보니것 또한, 기본적으로는, 카프카의 자식이다.
<타임퀘이크>에서 보니것이 ‘타임퀘이크’를 통해 실험하고자 하는 질문은 하나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얼마나 초라한가?’ 2001년의 우주는 ‘우연한’ 변덕에 의해 급작스럽게 수축하여 모든 것을 1991년으로 돌린다(우주의 수축이 시간을거꾸로 가게 한다는 생각은 스티븐 호킹이 <시간의 역사>에서 제안한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였으며, 그 사실 또한 책에 밝혔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모든 것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의식’ 혹은 ‘영혼’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 사람들은 재연 기간 초기에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가 어떻게 될 지 10년간의 미래를 모두 알고 있고 이를 전혀 거스를 수 없다. 그들은 의지대로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운명과 그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2001년이 되어 재연 기간이 끝났을 때 그들은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려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 사이에 세계에는 온갖 종류의 교통 사고가 나고 온갖 사람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결국 다시금 자유의지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타임퀘이크의 전후는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인간의 의식은 결국 타임퀘이크가 있든 없든 세계의 운명 앞에서 아무것도 못해 초라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타임 퀘이크 현상과 재연 기간은 일부분일 뿐이다. 보니것은 타임퀘이크를 배경으로1922년부터 2001년(이 소설이 쓰여졌을 때는 1997년이고, 보니것은 실제로는 2007년에 죽었다)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종횡무진으로 회고한다. 여기서 더욱 특이한 것은 실제 자신의 인생과 그의 창작(킬고어 트라우트가 대표적이다), 그의 사색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뒤죽박죽 섞인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는 소설가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며 등장인물들에대해 재담을 늘어놓다가, 어느새 동등한 등장인물이 되어 그들과의 친밀도를 밝힌다. 헌법의 제도나 전쟁의 윤리에 대해엄숙하게 제언하다가 갑자기 예술의 본질에 대해 명쾌하게 풀어내기도 하고, 사라져가는 문학에 헌정을 바치고 새로운기술들에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작가와 인물의 층위부터 문학의 장르, 그리고 시간의 구성까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 파편화된 이야기들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인간의 의지력을 비웃는다(물론 그것은 굉장히 간접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인간을 직접적으로 비웃는 대신 인간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것들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또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이야기를 창조한다). 이 반복되는 주제의 파편화된 이야기들을 보며 결국 독자가 깨닫는 것은 이것이 타임퀘이크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즉 타임퀘이크는 트릭이다. 설정상으로 볼 때 타임퀘이크는 매우 독특한, 인류에 한 번 밖에 찾아오지 않은 사건으로 보이지만, 사실 인류는 언제나 무력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운명에 굴복한 채 세상을 살아왔다. 이 사실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은 보니것이 나치 장교와 만난 경험이다. 나치 장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인생 10년을 허비했소.” 보니것은 이렇게 냉소한다. “타임퀘이크 이야기 아닌가?” 이 장면에서 이전까지 우스꽝스럽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한없이 깊은속울음을 삼킨다. 장교의 나지막한 탄식, 그것을 나중에 되돌아보는 보니것의 짧은 한 마디. 그 한 마디에서 급작스럽게전환되는 구어체의 익살, 그럼에도 너무나 짧아 웃기지는 않은 그 한마디. 이 모든 것이 빚어내는 조화. 이 때 이 소설은소설이기를 멈추고 시의 화법을 갖추는 듯 보인다. 이 문장들이 나오는 그 단락은 그냥 따로 떼어내서 시로 발표해도 고전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이토록 비극적일 순 없다.
그러나 보니것은 조금 더 가벼운 카프카가 아니다. 그는 카프카의 자식이다. 그는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부조리 이후를 바라보는 작가다. 이 소설은 후반부(서사가 전혀 없이 파편화된 이야기에 후반부라는 표현이 적절할까)에 들어 조금씩 희망의 빛을 보이고, 최종적으로 거대한, 그러면서도 작은 감동을 독자에게 안겨주며 끝난다. 그것은유쾌하면서도 머릿속에 석양이 떠오르고, 밤하늘을 보면서도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그런 감동이다. 그 희망은 ‘여러분은아팠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할 일이 있습니다.’라는, 책의 후반부 내내 반복되는 킬고어 트라우트의 전언에 요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보니것이 누차 강조하는 ‘가족’에 기대고 있기도 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트라우트가 말하는 ‘영혼‘과 ’인식’에 담겨 있기도 하다. 보니것은 거창한 사명과 자유의지 대신 ‘할 일’이라는 아주 작은 것을 제시한다. 국민이나 동지가 아닌 ‘가족’을 제안한다. 또한 너무 팽창해 희박해져버린 우주에서 작은 인식들이 오히려 행복의 비밀이라 말한다. 결국 그의 희망은 가장 일상적인 것에 담겨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일상에서의 최선을 통해 무언가 이루어내자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일상에서의 것들이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연극 속의 에이브러햄 링컨은 좋은 사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올거라고 믿고나아가자고 연설한다. 이 연설은 감동적이다. 특히 이 소설 속에서 링컨과 배우 링컨이 가진 아이러니를 생각해보면 더그렇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링컨의 연설이 아니다. 연극의 후반부에서 기적을 울린 킬고어 트라우트는 연극이 끝날 때쯤 장막 뒤에서 흐느껴 운다. 함께한 가족들과의 파티에서 마침내 드러내는 그의 울음은 링컨의 연설보다 훨씬 확실하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다.
소설가 김중혁이 추천사에 썼듯이 이 소설은 꿈틀대는 시간의 지도다. 보니것이 이토록 파편화된 형식을 동원해 시간의지도를 그린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그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타임퀘이크가 특수한 사건이 아님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이러한 형식을 택했을 것이다. 또한 비슷한 의미에서, 그는 이러한 형식이 인생의 본질을 그대로반영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게 인생은 끝없이 흘러가는 것도, 점차 쌓이는 것도, 계속해서 순환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분절되어 있는 것이며, 언제나 뒤섞이는 파편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이유보다도 더욱중요한 것은 세 번째 이유다. 이 소설은 시간을 기워 지은 ‘기억의 집’이다. 소설 내내 등장하는 작가 마을 ‘재너두’는 곧이 소설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재너두는 어떤 공간인가. 그곳에서 보니것은 자신이 일생을 살아오며 만나왔던 모든 인물을 다시 만난다. 다시 말해 보니것에게 재너두는 자신이 겪어온 삶을 자신의 인식과 영혼을 통해 모아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 하나의 가족이 되고, 이 과정은 트라우트가 마지막에 남기는 우주와 인식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말하자면 재너두는 보니것이 제안하는 또 하나의 희망이다. 기억을 모으고 또 기워 지은 집. 이 공간은 흡사 세상의 끝에 있는 듯 편안하다. 보니것에게 <타임퀘이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재너두였으리라. 이 소설 속의 모든 인물에는 보니것의 애정이 서려있다. 소설을 다 읽을 때쯤, 독자에게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스럽게 보인다.
보니것은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모든 생각과 기억을 뒤섞어 하나의 닫힌 시공간을 창조했다. 그러나 이 시공간은 본질적으로 실제 현실로부터 온 것이다. 인간에 대한 냉소와 아주 작은 희망, 그 전체를 관통하는 상상력, 역사부터 예술, 과학기술, 제도, 윤리에 대한 보니것의 모든 견해. 이 모든 것을 간직한 이 창작물(소설이라 부르지 않겠다)은 정말이지 경이롭다. 소설이 인생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인생의 위안이 되어줄 순 있다. 그리고 이렇게 강력한 위안도 드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