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유 뷔르니아의 만화 <양자 세계의 신비>를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던 동기는 기묘한 양자 세계를 어떻게 그려낼까에 대한 궁금증에서였다. 양자역학에 관한 만화는 사실 상당수 나와있지만(<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닐스 보어>, <퀀텀>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대부분 그것이 탄생된 과학사적 맥락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만화는 표지와 제목에서 풍기는 인상이 마치 양자 세계를 직접 그려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뇌 속의 신경계를 재치 있게 그려낸 만화 <뉴로코믹>처럼 말이다.



 그러나 만화를 읽으면서 그 기대는 깨졌다. 이 만화 또한 양자역학의 역사를 다루는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심지어 설명을 그렇게 잘 한 것 같지도 않았다. 양자역학 만화책 중 가장 읽기 힘들고 어려웠다. 감수를 맡은 김상욱 교수는 이 책을 '만화라면 양자역학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을까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이라고 했지만 차라리 그의 책이 훨씬 더 양자역학에 접근하기에 좋다(특히 '김상욱의 양자공부'는 한국 최고의 과학교양서로 뽑을만큼 잘 쓰여졌다).



  그래서 실망감을 안은 채로 힘들게 이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휴 에버렛의 이야기를 지나 다중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에서, 이를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책을 단순히 양자역학 전달용 만화로 읽어선 안 된다는 것,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과학과 철학의 세계에 관한 선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먼저 이 만화에서 그려내는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주인공이 어느 순간 '접속'해버린 이 세계는 과학자들이 있는 현실세계라고 하기도 힘들고 양자 세계라고 하기도 힘들다. 그것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굉장히 특이한 세계다. 이 세계와 가장 비슷한 세계는 루이스 캐럴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세계다. 실제로 주인공 밥은 앨리스가 토끼굴 속으로 '떨어지듯이' 의자 속으로 '떨어지면서' 이 세계로 들어가고, 앨리스가 같은 장소에서 꿈에서 깨어나듯 똑같이 의자에서 꿈에서 깨어나며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이 부분이 앨리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밥이 접속한 세계에 대해서 조금 더 갈피를 잡을 수 있다. 그 세계는 밥의 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에 밥의 개 '릭'의 죽음이라는 사연과 후반부 다중 세계 해석을 이용해 그 세계에 대한 해석을 확장한다.

 이 작품에서 밥은 앨리스와 달리 어떤 계기로 인해 양자 세계에 접속하게 된다. 동료이자 친구였던 강아지 '릭'의 죽음, 그리고'릭'의 영혼으로부터 온 계시가 양자 세계 여행을 촉발했다. 어찌보면 그는 앨리스보다 길가메시와 더 닮아 있다. 친하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세계의 본질,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구하려 나아간다는 점이 똑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플라톤이나 칸트 같은 철학자 대신 물리학자들을 그 질문의 원동자들로 삼는다. 그리고 그 탐구 끝에서.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을 던져버리고 다세계 해석을 주장한다. 물리학자 숀 캐럴이 <다세계>에서 다세계 해석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의 저자도 그것을 최종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세계 해석은 삶과 죽음에 관해서 매우 중대한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서로 인식하지 않으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인류 전체가 찾아온 삶과 죽음의 문제에 양자역학이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것은 이 책을 읽은 뒤 떠오르게 되는 상념이 아니다. 이 책의 작가는 앞에 밥과 릭의 죽음을 길게 배치하고,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를 책 막판에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이론인 동시에 죽은 이들을 위한 레퀴엠이기도 하다. 그 장면에서 참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감동은 그 위로와 경이로움에서 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철학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여정을 담은 책인 동시에, 철학에서 과학이 어떻게 활용되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 책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책이 교양과학서적 중에서는 굉장히 많다. 스티븐 호킹과 카를로 로벨리를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의 책이 이렇게 실재에 관한 부분을 다룬다. 브라이언 그린, 숀 캐럴, 짐 홀트 등은 직접적으로 본인들의 책에서 과학과 철학의 관계가 끈끈함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상욱 교수 같은 사람이 <김상욱의 과학공부> 같은 책에서 그런 부분을 지적했었다.



  그러나 만화책 중에 그런 책은 거의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책은 오직 하나,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로지코믹스>였다.

 이 책은 수학의 기초를 세우려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노력이 얼마나 처절하게 무너지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러셀은 힐베르트이 견해를 이어받아 수학을 완벽한 체계로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러셀 자신과 그의 제자 비트겐슈타인, 괴델에 의해서 수학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만화의 비범함이 드러나는 부분은 그 것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그것을 러셀의 삶과 엮는 부분이 이 만화를 높은 예술성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러셀은 사실 어린 시절 마주한 광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기초인 수학부터 정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만화는 러셀의 실패를 통해 삶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안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만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교양 만화가 이토록 뛰어난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데에 놀랐었다. 그래픽노블과 만화 예술의 깊이에 대해서는 이제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교앙 만화는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양자 세계의 신비>까지 읽은 지금, 이제 그런 한계가 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양자 세계의 신비> 같은 경우, 그렇게까지 뛰어난 책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교양 만화로써 기본적인 지식 전달의 효과가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것은 아마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저자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로지코믹스> 같은 경우, 굉장히 뛰어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단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세계의 신비>와 <로지코믹스>는 과학과 철학의 융합을 매우 흥미롭게 그려내는 만화다.



 


 이 만화들은 이제 과학 교양만화 또한 깊이와 품격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하는 책들이다. 생각해보면 그냥 일반적인 책들의 경우, 논픽션이 픽션에 비해 위상이 딸리지 않지 않는가? 그래픽노블이 문학의 깊이를 따라잡았다면, 교양만화도 논픽션의 깊이를 따라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제 교양만화도 진화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 또한 보인다. 이 만화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교양만화들이 학습만화의 굴레를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다. 분명 교양만화들이 클래식 논픽션으로 자리잡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그것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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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형 교수의 <수학의 수학>을 읽고 있다. <수학의 수학>은 '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단순하지 않다고 역설하며 수란 '연산 가능한 것'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여기서 연산이란 '두 개의 물체를 받아서 세 번째 물체를 주는 체계적인 방식'인데, 이 연산은 교환법칙, 결합법칙 등 여러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체계를 여러 개 보여주며 수라는 것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는 데, 그 예 중 눈길이 가는 것이 두 개 있었다.

 첫 번째는 위상수학적 연산이다. 위상수학은 물체를 구멍내거나 찢지 않고 유연하게 구부려서 변형시키는 수학이다.  그러므로 위상수학적으로 구멍의 개수가 같은 두 곡면은 동일한 곡면으로 간주될 수 있다. 위상수학에서 덧셈은 두 개의 곡면을 합치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 합쳐져도 구멍의 개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항등원'이 하나 있다. 바로   '구'다. 구는 구멍이 뚫려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즉 구가 '0'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에디슨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디슨은 어렸을 때 찰흙 두 덩이를 합치면 한 덩이가 되므로 1+1=1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논리를 덧셈은 그렇게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단칼에 자를 수 있으나, 그렇다면 덧셈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게 된다. 나는 위상수학적 연산이 에디슨의 대답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디슨의 '합치기'는 위상수학적으로 정의된 덧셈인데, 위상수학적으로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 물체는 0이므로, 에디슨의 유추는 1+1=1이 아닌, 0+0=0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식이 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입자의 연산이다. 저자는 만물을 이루는 표준모형의 기본 입자들의 상호작용이 연산의 조건을 만족하며, 따라서 입자들을 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만물은 수'라는 피타고라스의 주장이 옳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나는 입자의 연산이 조금 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는 지금껏 수를 매우 직관적으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엄밀한' 연산의 정의 또한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공식화 한 것이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교환, 결합법칙 등이 성립하므로 우리가 그것을 수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미시 세계에서도 이것들이 성립한다는 것이, 이 우주가 미시와 거시가 일맥상통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이 구조가 그런 프랙탈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익히 들어왔으나, 이렇게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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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이 된 기념으로 2020년에 읽었던 최고의 책들을 꼽아본다.


1.노마 히데키, <한글의 탄생>, 2011














2.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2019















3.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2016














4.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2005

















5.존 크리스토퍼, <풀의 죽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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