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의 여행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인식이 재정의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재난, 시간의 공백, 인식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들이 침입할 때 무엇을 배울 것인가-이 질문은 여전히 벌어지는 질문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새로운 질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밤의 여행자들>에서 많은 것들은 인식의 한계 내부에 있음에도 인식되지 않는다. 강유정의 해설은 이것을 ‘감성(sensitivity)만 남아있고 감수성(sensibility)이 사라졌다’라는 표현으로 꼬집는다. 다시 말해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구축한 삶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재난이라는 시간의 공백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것이 원래의 시간과 다르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시간을(삶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요나는 소설에서 카메라로 시간의 공백을 느끼려 하지만, 결국 현실은 카메라로 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요나는 소설에서 재난의 의미와 층위에 대해 다각도로 탐색하지만, 그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재난을 통해 시간을 짚어보려 했던 소설은 시간이 재난이나 다름없다는 깨달음으로 향한다. 카메라로도 담지 못하고, 음악으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서 이야기는 어떻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밤의 여행자들>은 소설 자체에서 종잡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느낌이 맴돈다. 윤고은의 방법론적 투쟁. 에도가와 란포의 말,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밤을 모를 뿐 아니라 낮도 모른다. 낮의 거짓을 깨우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낮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윤고은은 소설의 끝에서 밤으로 향한다. 그 밤은 죽음, 자연을 포괄한다. 그러나 다른 경로가 있을까? 그것이 이 서사의 다음 물음일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밤의 여행자들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임퀘이크
커트 보니것 지음, 유정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구 문학사상 유머의 측면에서 가장  성취를 이룬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카프카일 것이다물론 유머는 고대의 우화들에서도 곧잘 사용되던 기법이고루이스 캐럴이나 마크 트웨인은 유머의 힘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도했다그러나 유머를 완전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카프카다의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세계는 무의식이 지배한다부조리한 세계는 결코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고인간은 벌레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 속에서 인간의 실존은 그저 웃기고 가여운 것이다 모든 명제를 희한한 방식으로 입증하는 카프카의 통렬한 유머 감각은 이전의 서구 문학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그리고카프카의 자식들이 있다. 20세기 작가들은 카프카의 유머 아래에서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대표적으로 알베르카뮈는 <시지프 신화> 서문에서 ‘ 에세이에서는 부조리가 결론이 아닌 출발점으로 간주된다고 밝힌다그리고 보니것 또한기본적으로는카프카의 자식이다.


 <타임퀘이크>에서 보니것이 ‘타임퀘이크 통해 실험하고자 하는 질문은 하나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얼마나 초라한가?’ 2001년의 우주는 ‘우연한’ 변덕에 의해 급작스럽게 수축하여 모든 것을 1991년으로 돌린다(우주의 수축이 시간을거꾸로 가게 한다는 생각은 스티븐 호킹이 <시간의 역사>에서 제안한 생각이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였으며 사실 또한 책에 밝혔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모든 것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의식’ 혹은 ‘영혼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사람들은 재연 기간 초기에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노력한다그러나 그들은 앞으로가 어떻게   10년간의 미래를 모두 알고 있고 이를 전혀 거스를  없다그들은 의지대로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운명과 그대로 움직인다그리고 2001년이 되어 재연 기간이 끝났을  그들은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려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다 사이에 세계에는 온갖 종류의 교통 사고가 나고 온갖 사람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결국 다시금 자유의지가 주어졌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그렇다면 타임퀘이크의 전후는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인간의 의식은 결국 타임퀘이크가 있든 없든 세계의 운명 앞에서 아무것도 못해 초라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소설에서 타임 퀘이크 현상과 재연 기간은 일부분일 뿐이다보니것은 타임퀘이크를 배경으로1922년부터 2001( 소설이 쓰여졌을 때는 1997년이고보니것은 실제로는 2007년에 죽었다)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종횡무진으로 회고한다여기서 더욱 특이한 것은 실제 자신의 인생과 그의 창작(킬고어 트라우트가 대표적이다), 그의 사색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뒤죽박죽 섞인다는 것이다그는 언제는 소설가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며 등장인물들에대해 재담을 늘어놓다가어느새 동등한 등장인물이 되어 그들과의 친밀도를 밝힌다헌법의 제도나 전쟁의 윤리에 대해엄숙하게 제언하다가 갑자기 예술의 본질에 대해 명쾌하게 풀어내기도 하고사라져가는 문학에 헌정을 바치고 새로운기술들에 한탄하기도 한다그러면서 작가와 인물의 층위부터 문학의 장르그리고 시간의 구성까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린다 파편화된 이야기들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인간의 의지력을 비웃는다(물론 그것은 굉장히 간접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그는 인간을 직접적으로 비웃는 대신 인간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것들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이야기를 창조한다).  반복되는 주제의 파편화된 이야기들을 보며 결국 독자가 깨닫는 것은 이것이 타임퀘이크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타임퀘이크는 트릭이다설정상으로   타임퀘이크는 매우 독특한인류에   밖에 찾아오지 않은 사건으로 보이지만사실 인류는 언제나 무력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운명에 굴복한  세상을 살아왔다 사실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은 보니것이 나치 장교와 만난 경험이다나치 장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생 10년을 허비했소.” 보니것은 이렇게 냉소한다. “타임퀘이크 이야기 아닌가?”  장면에서 이전까지 우스꽝스럽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한없이 깊은속울음을 삼킨다장교의 나지막한 탄식그것을 나중에 되돌아보는 보니것의 짧은  마디  마디에서 급작스럽게전환되는 구어체의 익살그럼에도 너무나 짧아 웃기지는 않은  한마디 모든 것이 빚어내는 조화   소설은소설이기를 멈추고 시의 화법을 갖추는  보인다 문장들이 나오는  단락은 그냥 따로 떼어내서 시로 발표해도 고전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이토록 비극적일  없다


 그러나 보니것은 조금  가벼운 카프카가 아니다그는 카프카의 자식이다그는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하지만부조리 이후를 바라보는 작가다 소설은 후반부(서사가 전혀 없이 파편화된 이야기에 후반부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들어 조금씩 희망의 빛을 보이고최종적으로 거대한그러면서도 작은 감동을 독자에게 안겨주며 끝난다그것은유쾌하면서도 머릿속에 석양이 떠오르고밤하늘을 보면서도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그런 감동이다 희망은 ‘여러분은아팠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그리고  일이 있습니다.’라는책의 후반부 내내 반복되는 킬고어 트라우트의 전언에 요약되어 있다고   있겠다또한 보니것이 누차 강조하는 ‘가족 기대고 있기도 하고마지막 장면에서 트라우트가 말하는 ‘영혼 ’인식 담겨 있기도 하다보니것은 거창한 사명과 자유의지 대신 ‘ 이라는 아주 작은 것을 제시한다국민이나 동지가 아닌 ‘가족 제안한다또한 너무 팽창해 희박해져버린 우주에서 작은 인식들이 오히려 행복의 비밀이라 말한다결국 그의 희망은 가장 일상적인 것에 담겨 있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일상에서의 최선을 통해 무언가 이루어내자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는 오히려 우리가 가질  있는 최선의 것이 일상에서의 것들이라고 이야기하는  하다소설의 후반부에서 연극 속의 에이브러햄 링컨은 좋은 사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올거라고 믿고나아가자고 연설한다 연설은 감동적이다특히  소설 속에서 링컨과 배우 링컨이 가진 아이러니를 생각해보면 그렇다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링컨의 연설이 아니다연극의 후반부에서 기적을 울린 킬고어 트라우트는 연극이 끝날 때쯤 장막 뒤에서 흐느껴 운다함께한 가족들과의 파티에서 마침내 드러내는 그의 울음은 링컨의 연설보다 훨씬 확실하다 장면의 아름다움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없다.


소설가 김중혁이 추천사에 썼듯이  소설은 꿈틀대는 시간의 지도다보니것이 이토록 파편화된 형식을 동원해 시간의지도를 그린 것에는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우선 그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타임퀘이크가 특수한 사건이 아님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이러한 형식을 택했을 것이다또한 비슷한 의미에서그는 이러한 형식이 인생의 본질을 그대로반영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에게 인생은 끝없이 흘러가는 것도점차 쌓이는 것도계속해서 순환하는 것도 아니다인생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분절되어 있는 것이며언제나 뒤섞이는 파편화된 것이다그러나   이유보다도 더욱중요한 것은  번째 이유다 소설은 시간을 기워 지은 ‘기억의 이다소설 내내 등장하는 작가 마을 ‘재너두  소설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재너두는 어떤 공간인가그곳에서 보니것은 자신이 일생을 살아오며 만나왔던 모든 인물을 다시 만난다다시 말해 보니것에게 재너두는 자신이 겪어온 삶을 자신의 인식과 영혼을 통해 모아놓은 것이다그리하여 그들은  하나의 가족이 되고 과정은 트라우트가 마지막에 남기는 우주와 인식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말하자면 재너두는 보니것이 제안하는  하나의 희망이다기억을 모으고  기워 지은  공간은 흡사 세상의 끝에 있는  편안하다보니것에게 <타임퀘이크>  자체로 하나의 재너두였으리라 소설 속의 모든 인물에는 보니것의 애정이 서려있다소설을  읽을 때쯤독자에게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스럽게 보인다.


보니것은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모든 생각과 기억을 뒤섞어 하나의 닫힌 시공간을 창조했다그러나  시공간은 본질적으로 실제 현실로부터  것이다인간에 대한 냉소와 아주 작은 희망 전체를 관통하는 상상력역사부터 예술과학기술제도윤리에 대한 보니것의 모든 견해 모든 것을 간직한  창작물(소설이라 부르지 않겠다) 정말이지 경이롭다소설이 인생을 바꾸진 못하더라도인생의 위안이 되어줄  있다그리고 이렇게 강력한 위안도 드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후의 증인 - 상 대한민국 스토리DNA 7
김성종 지음 / 새움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증인>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지향점이 다르다. 물론 이 둘의 주제는 모두 '사회적 비극'이다. 그러나 전반부와 후반부는 같은 주제를 도착점으로 놓느냐 출발점으로 놓느냐하는 점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다. 전반부는 (이 소설이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심사위원들의 말처럼) '추리적 기법을 통해 한국전쟁의 비극을 형상화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다. 전반부만 볼 때 김성종은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일상의 사건들에도 깊은 사회적 비극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서 독자가 알게 되는 것은 이 소설의 목적이 비극을 배경으로 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니, 좀 더 확실히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김성종은 오병호, 황바우, 손지혜, 엄창규, 한동주, 양달수, 강만호 등 각 인물들이 한국전쟁의 비극을 배경으로 어떤 정서를 가지고, 어떤 윤리적 태도를 취하며, 어떻게 책임을 지는지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그러나 이 탐구는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는 탐구가 아니다. 이 탐구는 정해놓은 결론을 얻기 위해 간절히 뻗는 손짓에 가깝다. 이 소설의 최종적 테마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애' 혹은 '휴머니즘'일 것이다. 과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이 질문은 황바우부터 오병호, 심지어 정만섭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물을 관통한다. 이 인간 탐구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손지혜를 둘러싼 공비와 황바우의 태도 차이다. 이 둘은 인간의 가장 본성적인 부분을 각각(전자는 성욕, 후자는 인류애) 대표하고 있고, 김성종은 이 둘 가운데 무엇이 맞는지 묻는다.

 그리고 김성종은 황바우를 믿고, 인류애를 믿는다. 그는 오직 이것만이 비극을 근본적으로 '증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거대한 비극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 인류애 혹은 양심. 오병호와 엄창규가 '이 사회가 살아있는지'를 그토록 부르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짊어진 황바우는 끝내, 그리스도의 길을 택한다. 그는 이 모든 비극을 안고 하늘로 간다. 여기서 그를 추동한 것은 어떤 사명감이 아니다. 단지 가족을 걱정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인류애일 뿐이였다. 그를 뒤따른 손지혜와 오병호 또한 마찬가지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최후의 증인은 그렇게 쓰러진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를 없애벌미으로써, 이 사회의 죄악과 비극을 영원히 박제한다. 그들은 마침내 '최후의 증인'이 된다. 그들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그들은 단순히 사건만을 증언하지 않는다. 인류애가 말살되고 양달수와 한동주와 같은 이들이 설치는, 이 세상 자체를 증언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후의 증인 - 상 대한민국 스토리DNA 7
김성종 지음 / 새움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없애 마침내 증언하는 살신성인의 기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칠칠단의 비밀 - 방정환의 탐정소설 사계절 아동문고 34
방정환 지음, 김병하 그림 / 사계절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 희한하게도 책에 실린 두 소설(<동생을 찾으러>와 <칠칠단의 비밀>) 모두 기억이 초중반부에 멈춰 있었다. <동생을 찾으러>에 나오는 기차역 장면, <칠칠단의 비밀>에서 중국 봉천으로 건너간 뒤의 이야기 등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들이 민족주의에 매우 단단히 기반되어 있음에 먼저 놀랐다. <동생을 찾으러>와 <칠칠단의 비밀> 모두에서 동생(순희, 순자)을 찾는 주인공(창호, 상호)들은 모두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의 은유이다. 이 두 작품 모두에서 남매 사이는 매우 단단히 결속되어 있고, 주인공들은 공권력의 힘을 거의 빌리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의 힘을 빌려 일을 해결한다. 특히 주인공들이 혼자서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이 중요한데, 방정환은 소설 내에서 끊임없이 주인공의 한계 상황을 제시하고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동료들을 등장시킨다. <칠칠단의 비밀>에서는 보다 더 노골적인데, <동생을 찾으러>와 달리 태생부터 잃어버린 곡마단 남매의 등장이나 후반부 한인 협회의 등장 등은 명백히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 미스터리, 혹은 첩보 소설의 시초와 같은 장르적 평가도 이 책엔 충분히 가능하다. <동생을 찾으러>에서는 아직 그 면모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지만, 2년 뒤 발표된 <칠칠단의 비밀>은 상당히 감탄스럽다. 일개(?) 곡마단을 대륙의 아편 밀수업체로 확장시키는 설정부터, 이 설정과 남매의 비밀을 엮어 깔아놓은 복선, 칠칠단의 암호나 소굴의 비밀 등까지 첩보물의 클리셰를 동양적으로 훌륭히 변용한 사례들이 많다. 특히 상호가 펼치는 각종 계교들은, 흡사 셜록 홈즈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 느낌까지 있다.

 그러나 두 소설 모두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은 결말부이다. <칠칠단의 비밀>의 경우 <동생을 찾으러>보다는 서사 안배가 잘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 역시 결말부가 급히 마무리되었으며 허술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동생을 찾으러>는 전체적인 서사의 균형조차 조금 기우뚱하다. 장르물의 초창기 작품들에게 이 정도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그럼에도 이 책을 읽다보면 방정환의 타고난 재능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장점들도 분명히 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직도 생생하게 읽히게 하는 방정환의 필력이다. 그러니 나는 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르 소설이 꽤나 기분좋게 출발했다고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