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김원영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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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개인들로 이뤄진 공동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평등이고 무엇이 차별인지 정의해야 한다. 평등은 좋고 차별은 나쁘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럼 왜 지극히 차별적인 세상이 필요한 걸까? 인간은 각자가 가진 고유한 능력을 갈고닦아 다른 사람과는 차별적인 존재가 돼야 한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하루키나, 봉준호나, 엘론 머스크가 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차별적인 존재란, 내가 무엇이 돼야 할지를 스스로 정의하고, 그 모습에 다가가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평등은 무엇이 차별적인 존재인가를 정의하는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보장하는 개념이다. 지체장애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러시아 국립 발레단의 무용수가 될 수 없다. 이 장애인의 무용이 일반적 춤이 가진 예술적 가치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다는 이야기는, 현실을 박박 긁어 버린 뒤 낭만을 가득 채운 소년 만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이 대책 없이 낙관적인 이야기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장애인의 춤은 다르다. 맹목적인 비교와 경쟁에 익숙한 우리는 차이를 우열로 바꾸는데도 익숙하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의 무의식에 숨어, 은연중에 드러난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무용수가 무대를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공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춤에는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이걸 정말로 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춤을 돈 주고 관람할 가치가 있을까?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당신이 나를 배려해 내 앞에서 발레를 추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온전히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발레를 잘 추는 '능력'으로 당신은 내가 모르는 세계에 접속하는 다양한 방법을 나에게 제안할 수 있다. 내게도 춤출 '힘'이 있음을 깨달은 지금 나는 발레를 추는 당신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데 좌절하지 않는다." (p.9)


탁월함이란 내가 잘하는 영역을 섬세하게 이해할 때 쏟아져 나오는 능력의 폭풍우다. 내게 춤출 '힘'이 있다는 믿음은 나를 탁월함의 경지로 올려놓고자 하는 동기이자 당신의 '힘'을 긍정하게 만드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힘을 믿으며 자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할 방법을 고안한다.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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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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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는 평범한 고등학교 교사였다. 부인과 별거를 위해 최근 다른 도시로 전근을 왔다. 고인 물들이 가득한 학교였기에 준후의 회사 생활은 쉽지 않았다. 어렵고 힘든 일은 젊다는 이유로 모두 준후에게 쏟아졌다.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무미한 그의 인생에 유일한 맛은 다현과의 연애였다.


다현은 준후의 제자였다.


유부남 고등학교 교사와 학생의 사랑. 범죄였고, 그래서 준후의 구미를 당겼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깊은 관계를 맺었지만 그 관계를 지속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준후는 다현이 자신의 삶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건 싫었다. 다현은 준후가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과 새 삶을 꾸리기를 원했다. 부모는 일찍 죽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까지 세상을 떠났다. 다현은 따뜻한 가정을 원했다. 준후에게 다현은 일탈이었다.


이 문제로 크게 다투고 난 뒤 어느 날 다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준후는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다현이 기댈 곳은 자기밖에 없었으니까. 준후는 자신의 교실에서 다현과 뜨거운 정사를 나눴다. 야근을 마친 뒤 다시 한번 만나자고 약속까지 하면서.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준후는 다현의 전화벨 소리가 교실에서 울리는 걸 들었다. 준후는 교실로 올라왔다.


다현은 나체로 목을  채 죽어있었다.


<홍학의 자리>는 <2인조>의 작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빡빡한 소설이다. 이것저것 따질 거 없이 도대체 범인이 누구야, 왜 죽인 거야 라는 궁금증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뿜어져 나온다. 멈출 수가 없다.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기 위해 독자는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소설은 야금야금 매듭을 풀어나간다. 잘 꾸민 미드처럼, 에피소드 끝자락마다 새로운 단서를 뿌려놓고 독자가 덫에 걸리기를 기다린다. 하나둘씩 용의자가 등장한다. 충격의 연속이다.


소설은 잡기술을 쓰지 않는다. 프릭쇼처럼 보이는, 고양이도 물고 가지 않을 덜 떨어진 트릭으로 완전범죄 같은 걸 꿈꾸지 않는다. 억지 반전은 없다. 장담컨대 소설의 최종장에서 당신은 꽤 충격적인 반전을 맞닥뜨릴 것이다. "And like that... he's gone"(Usual Suspect)이나 "I see dead people"(Sixth Sense) 만큼은 아니겠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이 이 반전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거운 진실을 들어 올리기에 그 대사는 힘이 부족했다. 영화라면 다른 연출이 가능했을 것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미도의 앨범을 한 장씩 넘기는 씬처럼. 좀 더 고조시키는 묘사가 있었다면, "I see dead people."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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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생성되지 않는다 - 포스트 AI 시대, 문화물리학자의 창의성 특강
박주용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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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시간 대학교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KAIST 포스트 AI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학창 시절에는 미식축구에 빠져 '울버린 매서드'라는 전미 대학 리그 네트워크 랭킹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좋아한다. 한때는 사진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문화물리학자라고 자칭하는데, 아마도 인류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 과학자인 듯하다. 지금은 KAIST 문화기술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과학과 문화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처음에는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에 깃든 과학의 원리를 밝히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다 보니 진정한 연결고리는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 이상의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저자가 풀어낸 이야기들을 모아놓았다. 때로는 미술이, 때로는 영화가, 그리고 음악이, 스포츠가 과학이라는 외피를 둘러쓰고 등장한다.


인문학에 빠진 과학자만큼 무서운 게 없다. 구양진경의 심법에 구음진경의 초식을 갖춘 셈이니까, 어떠한 주제로도 논박이 가능하고 무슨 일에도 자기만의 주장을 내놓을 수 있다. 쉽게는 르네상스인이라고도 하는데, 모나리자를 그리면서도 헬리콥터를 설계할 줄 알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빗대어 만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어딘지 모르게 '인간'에 경도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인문을 과학보다 더 큰 일로 느끼는 것이다. 마치 사울이 폭풍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가장 열렬한 사도가 된 것처럼(심지어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이런 태도는 특히 AI기술을 대할 때 더 강해진다. KAIST에서 포스트 AI 연구소장을 역임하기까지 했으니 AI 대혁명으로 들끓는 지금보다 한참 전부터 AI를 연구해 왔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AI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기술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저자 같은 전문가의 눈에는 현존하는 AI기술의 치명적인 단점들이 얼마나 많이 보이겠는가. <미래는 생성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AI기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나도 지금의 AI 기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발전 속도는 공포스러울 정도다. AI가 만들어내는 글과 음악, 이미지들은 얼핏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고, 판박이처럼 서로가 똑같아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 '작정하고 만든' 콘텐츠와 비교해 보면 너무나도 허술한 점이 많은 것이다. AI가 인간의 단순 노동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는 있겠지만 창의력이 고도로 요구되는 분야를 대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인간은 영원히 기술을 지배하며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는 '산업'의 힘을 지독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산업은 늘 부가가치에 방점을 찍어왔다. 떼 돈을 벌 수 있는, 불가능한 영역에 전력을 다해온 것이다. 그래서 AI는 가장 창의적이라고 알려진 영역, 그러니까 큰돈이 몰리는 영역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가장 창의적인 인간이 가장 먼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한 걸까? 한때는 우리 인류에게도 개인이라는 개념이 존재조차 하지 않던 시절, 신이 이 세상을 전부 지배하던 천년의 암흑기가 있었다. 하지만 14세기 무렵 암흑의 껍질을 깨고 이른바 '인본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이 태동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과거의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미래가 열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믿는 인간의 모습, 본질, 가치들이 생명이 태어나던 시절부터 존재한 개념처럼 느껴지겠지만 이는 역사적, 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 태양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리뿐이다.


인간은 과거를 학습해 모양을 가다듬은 뒤 미래로 던진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과거 혹은 수정된 과거다. AI는 인간이 했던 말, 인간이 썼던 글, 인간이 찍었던 사진과 영상을 학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AI의 생성물들을 단순히 학습된 결과를 기계적으로 내놓은 것이라 폄하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단언컨대 인간의 시대는 끝난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는 건 인간의 파멸이 아니다. '새로운 인간'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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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조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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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조>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구성이 엉성한 소설이다. 대도의 완벽한 사기극을 기대했건만 '2인조'는 잡법이라고 보기에도 한참이 모자란 얼빵이 들이었다. 너무 황당해 화도 안 난다. 3, 7, 12, 19, 28, 이런 식으로 페이지를 건너뛰어 읽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헐겁다. 다음에 읽은 <홍학의 자리>가 아니었다면 정해연을 다시 읽을 일은 영영 없었을 것이다.


<2인조>는 교도소에서 만난 잡범 2명이 인생을 역전시킬 큰 건을 만들기 위해 다시 뭉치면서 시작한다. 하나는 사기, 다른 하나는 절도, 둘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갖췄기에 합이 잘 맞을 거라 생각했다. 출소 후 둘은 최근 재개발로 뭉칫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신도시로 향한다.


건수를 물색하던 두 사람은 한 노인을 차로 치는 교통사고를 내버린다. 훔친 차에 갓 출소한 두 사람. 일이 꼬이지 않길 간절히 바랐던 두 사람은 노인이 하자는 대로 이끌려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물론 두 사람에게도 속셈은 있었다. 얼떨결에 따라 들어간 노인의 집은 번드르르했고 착수금을 꺼내준 금고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금은보화 앞에서 세 사람의 치졸한 수싸움이 시작된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반전에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지만, 전율이 인다거나, 폐부를 찌르지 않고 난데없이 떠올라 누더기처럼 엮인다. 그 사이로 알맹이들이 빠지고 나면 남는 건 말짱 꽝. <2인조>는 장르 소설이다. 이런 책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임프린트다. 오마카세에서 김치를 달라고 할 수 없듯이 라면집에서 와사비를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것이고, 우열은 없다. 그래도 뭔가 아쉬운 건 사실이다.


소설이 짧은 건 대단한 미덕이다. 술잔이 식기 전에 화웅의 머리를 들고 온 관우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어디 한 번 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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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리는 현대사 쟁점
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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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교육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역사는 늘 천대받는 종목이다. 아무래도 역사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다. 훨씬 모호하고 어려운 인문학이 나름 각광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한 이유도 출세에 유용하다는 느낌을 절묘하게 포장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역사는 뭐가 없다. 역사를 잘 안다는 건, 그저 과거에 벌어진 일들을 달달 외우는 것에 불과하다. 역사 얘기를 하는 사람은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꼰대 부장님 뿐이다. 지루에 고루를 더했으니, 무슨 수로 살아남겠는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역사는 이제 종교와 마찬가지로 금기가 되어버렸다. 역사를 그저 사실로 여기는 건 굉장히 순진한 생각이다. 현대인이 점점 탈역사화되고 있다면 관심 가진 이들의 역사는 '정치화'되고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 지, 저마다의 이념에 따라 마음껏 구부리고 찢고, 갖다 붙인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여기에 종교화까지 더해지고 있다.


2024년 광복절은 정말 슬펐다. 어디서부터 대한민국인가 하는 문제로 두 집단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이 같은 나라의 국민으로,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고, 이 골이 얼마나 깊은지 경험했다. 나는 일본이 정말 미웠다. 미국도 미웠다. 소련도 미웠다. 북한도 미웠다. 그러나 가장 미운건 그 수많은 시간 동안 과거를 말끔하게 매듭짓지 못한 우리 자신이었다.


대한민국 근대사는 청산과 인정, 반론이 어렵다. 모두 정치화, 종교화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는 잘못된 사실 관계에 기인한 것이 많다. 그것이 그대로 확정되어 교육을 통해, 동일한 이념을 지지하는 집단을 통해 확산한다. IS가 광신도들을 모집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에겐 '성전'말고 할 게 없다.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는 근대사 중에서도 하나하나가 리히터 규모 10의 파괴력을 갖는 쟁점만을 다룬다. 너무 두려워 입이 아니라, 마음속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이야기들. 우리가 쉬쉬하고 외면할수록 더 더럽고, 더 냄새나고, 더 추악해질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차분하고 우아하게 논했던 책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저자는 유려하게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그래서 재미는 좀 덜할 수 있겠지만.


내 말이 맞다는 걸 광속으로 확증해 주는 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평양냉면 같은 글 맛에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읽고 따져보자. 나의 생각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로 뭐가 맞고, 뭐가 틀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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