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전집 1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홍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실수>

다음은 인터넷 정신분석 카페에서 찾은 어느 직장인에 대한 얘기다. 

나는 내 상사가 지시하는 일들을 자주 까먹곤 한다. 아침에 직접 불러 지시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퇴근 쯤에 일의 결과를 확인하려는 질문을 받고 화들짝 놀라 당황한다. 

한편 이런 일도 있다.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제품의 시료를 자주 잃어버린다. 잘 챙겨야지 챙겨야지 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시료는 사라져 버린 뒤다. 이 모든게 꼼꼼하지 못하고 게으른 천성 탓이다. 반복되는 실수를 설명하는데는 이 만한 근거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지시한 일은 반드시 수첩에 적었다. 수첩을 하루 종일 내 노트북 앞에 펼쳐 놓았다. 시료에는 이름을 적었다. 시료를 관리하는 바구니도 만들었다. 

몇일 
뒤 나는 내 시료가 또다시 사라져 버린걸 깨달았다. 잃어버린 시료를 찾아 사무실을 헤매는데 상사가 나를 불러 유럽향 모델의 진행 상황을 물어 보았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동시에 멋적은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질문이 이미 몇일 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내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남자는 그 날 이후로 정신과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몇 주에 걸쳐 진료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루종일 눈 앞에 펼쳐둔 수첩을 두고도 지시한 일을 까먹은 이유는 내가 격무에 시달려 주의가 흩으러졌기 때문이 아니다. 시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기어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시료 분실의 이유 또한 
잘못된 관리 방법에 있는게 아니다.

상사의 업무 스타일은 어지간히 나와 맞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마이크로 매니징하는 꼼꼼함이 답답했고 말랑말랑 유연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딱딱한 논리적 체계를 세우고마는 강박이 나는 지독히도 싫었다. 내가 매번 시료를 잃어버리고 상사의 지시를 잊은 이유는, 

내가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반복된 실수는 잠재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상사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내가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마다 내 마음은 '당신이 시킨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실수는 심리행위다. 심리란 '마음의 작용과 의식의 상태', 행위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짓'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실수는 심리행위다'라는 말에는 실수가 결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즉 그 속엔 명백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위 이야기는 실수가 심리행위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전형적 사례다. 



<꿈>

나는 한 때 핵폭탄이 떨어져 주변의 모든 것들이 먼지로 사라져 버리는 꿈을 반복해서 꾼 적이 있다. 나는 눈 앞에 떨어지는 핵폭탄을 보고 미친듯이 도망쳤지만 결과는 언제나 매한가지, 먼지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런 꿈을 해석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시 나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한창 낙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골방에 쳐박혀 지겨운 영어 공부와 자기 소개서 쓰기를 반복했지만 취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초조와 불안이 꿈 속에서 핵폭탄과 지구 멸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꿈 해몽가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가 집중한 것은 꿈의 '해석'이 아니라 꿈의 '원인'이었다. 프로이트 이전의 사람들은 꿈을 뇌의 경련, 혹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해프닝 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실수 행위의 탐구에서 보여줬듯 프로이트는 꿈에도 명백한 의도와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는 꿈이 인간의 '소망 충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봤다. 그것은 꿈이 잠재된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인데, 우리는 매일 밤 꿈을 꿈으로써 현실 세계에서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 꿈 얘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핵폭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죽는 꿈을 반복해서 꿨다. 그것은 분명 취업에 대한 불안과 초조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난 이 꿈 얘기에서 몇 가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내 꿈은 반복될 때 마다 완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재현됐지만 거기서 딱 한 가지 매번 변화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죽는 친구들이었다. 모든 것이 똑같았음에도 유독 이 부분만이 달랐던 이유는 뭘까? 나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방법에 따라 차분히 나의 내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걸 고백하는 건 쉽지 않다. 만일 당신의 정신과 의사가 당신의 꿈 얘기를 듣고 이런 해석을 내렸다면 십중팔구 책상을 뒤엎고 병원을 뛰쳐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모두 열고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자. 

처음 꿈에서 나와 함께 죽은 건 20년 가까이 사귄 죽마고우였다. 둘도 없는 내 친구지만 난 한 때 이 친구에게 심각한 컴플렉스를 느낀 적이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그 컴플렉스는 죽을만큼 괴로운 것이었고 
'이 친구가 사라져 버렸으면'하는 소망을 품곤 했다. 두 번째로 죽은 친구 또한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언젠가 일을 하다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화해하고 그 후로는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 이 친구와는 절대 같이 일을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의 일을 모두 잊었고 지금도 여전히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의식은 그 때의 감정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다 나의 이성이 잠드는 시간을 틈타 당시의 불쾌한 감정을 꿈 속으로 밀어넣어 친구들을 살해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과격한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언제나 이 같은 욕망들을 전제로 한다. 꿈의 내용으로만 봐서는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도 그 속에 잠재된 욕망들을 파해치고 나면 어김없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꿈은 도대체 왜 우리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 걸까? 그건 우리의 꿈이 검열을 당하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많이 느슨해지긴 하지만 우리의 윤리, 도덕, 욕망을 억압하는 이성들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꿈은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을 상징하는 대체물을 만들고, 그것의 일부를 과장하고, 또 삭제하고 때때로 하나의 상징물로 압축하여 자신의 본 모습을 완전히 지워 버린다. 

꿈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이처럼 왜곡된 상징의 필름들을 오리고 붙여 숨겨진 욕망을 현상해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

프로이트가 실수와 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것이 신경증과 매우 유사한 매커니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글자는 분명 한글인데 봐도 봐도 미궁이다(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책을 반이나 차지하는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채 이런 리뷰를 쓰고 있다면 그건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를 모독하는 일일까? 하지만 모르는건 모르는거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이 책에 대한 나의 얘기가 여기까지라는 거다.

p.s - 누가 이 책을 쉽다고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꿈의 해석'전에 이 책을 보라는 사람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꿈의 해석'을 봤기 때문이다. 조만간 그 책에 대해 써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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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감독 롭 마샬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영화였다. 개성 이만점의 캐릭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유머, 비관습적인 액션 등 전작들이 쌓아온 DNA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 이 영화의 유일한 칭찬 거리는, 캡틴 잭 스패로우를 조니 뎁이 연기했다는 것 정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업적을 이토록 손쉽게 무너 뜨릴 수 있을까? 제리 브룩 하이머는 전시관의 유리를 깨고 더러운 쇠사슬을 걸어 명예의 전당에 잠들어 있는 전설의 블랙펄을 쓰레기 투성이의 바다위로 끌어내고야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냈더라도 그 본성은 역시 장사꾼에 지나지 않음을 천명한 사건이라고나 할까?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감독이 바꼈다.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독특한 코미디를 영화에 이식한 고어 버번스키가 다른 영화의 연출을 핑계로 떠나 버렸다. 물론 바톤을 이어 받은 롭 마샬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 남자의 데뷔작 '시카고'를 보라! 그러나 다음 작품 게이샤의 추억(2005), 최근작 나인(2009)에 이르기까지 롭 마샬은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남자에게 
시리즈의 새 기점이 될 중요한 작품을 맡기는게 옳은 결정이었을까? 롭 마샬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시대극과 모험영화'라고 했지만 개봉한 영화를 보면, 때로는 그냥 좋아하는 걸로 끝낼 일도 있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둘째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올랜드 블룸의 부재다. 심각했다. 지금까지 캐리비안의 해적은 윌 터너(올랜드 블룸),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잭 스패로우(조니 뎁), 이 세 사람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 이야기를 때로는 
미스테리로 또 때로는 액션 활극으로 풀어나가며 타이트한 긴장감과 볼거리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 익숙한 삼각 관계가 해체되고 나자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말 그대로 '낯선 이야기'가 되어 망망한 바다 위를 표류했다. 

나는 잭 스패로우와 새로운 적 
검은 수염, 그리고 소문난 인어가 쏟아내는 모험과 코미디를 기대하며 집중을 거듭했지만,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건 나를 아득한 꿈 속으로 빠뜨리는 강력한 수면제였다.

셋째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존재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새로운 여주인공 안젤리카 역을 맡았으며 안젤리카는 설정상 잭 스패로우와 애증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증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랑과 증오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과 증오의 사이다. 그래서 애증 관계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무게추를 따라 아슬아슬한 밀고 당기기를 해야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에서 잭 스패로우를 과감히 크라켄의 배때기로 밀어 넣은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을 보라. 그에게 수갑을 채우기 전에 보여준 엘리자베스 스완의 키스는 진심이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제는 죽어줘야겠어!' 안젤리카에겐 이런 느낌이 없다. 소리를 지르고 열심히 뛰어 다니지만 그녀는 그저 철없는 말괄량이를 연기할 뿐이었다. 잭 스패로우를 파멸시키기 위한 유혹,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애틋한 사랑, 안젤리카는 이 중 어느 것 하나 보여주지 못했다. 



                       





1984년 '나이트메어'로 데뷔한 이래 조니 뎁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결코 대중적인 배우는 아니었다. 이런 그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든 것이 바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다. 조니 뎁은 주목받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였고 
실제 삶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바로 그 경험을 잭 스패로우의 고독한 눈빛으로 표현해냈고 그를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당이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망나니로 만들어 냈다. 이렇게 탄생한 잭 스패로우가 낯선 조류에 휩쓸려 허우적 대는걸 보니 시리즈의 팬으로서 그리고 조니 뎁의 팬으로서,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낯선 조류'를 얘기하면서 인어 얘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 실망할까봐 미리 말해주면 인어는 별로 볼거리가 되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볼게 인어밖에 없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이 영화가 최악이었다는 얘기를 1980년대식 농담으로 표현한 거니 다가오는 주말을 위해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다행히 당신의 Box Office엔 쿵푸팬더2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라는 대안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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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겠지만 X-Men 퍼스트 클래스는 X-Men 시리즈의 프리퀄이다.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대통령은 존 F.케네디. 굳이 그 시절의 대통령을 언급한 이유는 이 영화가 존 F.케네디 재임 시절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때는 바야흐로 냉전시대. 소련과 미국이 군비 확장에 열을 올리고 전 세계가 핵 전쟁의 위협에 벌벌 떨던 시절 이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쿠바 미사일 사태다. 

이는 사실 미국이 초래한 사건으로 
미국이 터키와 중동에 ICBM(대륙간 탄도탄: 핵탄두를 실어 보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자 이에 대응하여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서 발생했다. 소련의 미사일 기지 건설 과정이 미국의 첩보 기관에 의해 발각되자 존 F.케네디는 '즉각 건설을 중단하지 않으면 제 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과격한 발언으로 온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기가 꺽인 소련이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단하면서 
존 F. 케네디를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진정한 자유의 수호자로 만들어 주지만 영화는 이 위기가 사실은 X-Men들의 활약으로 해결됐음을 가정한다. 








X-Men 퍼스트 클래스가 전작과 다른 한 가지. 그건 바로 X-Men 1, 2편의 감독이자 불과 26살의 나이에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 1995)'를 연출한 천재 감독 브라이언 싱어가 제작과 각본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에릭(매그니토)의 과거가(유태인으로서 고통 받은) 
비중있게 그려지고 '뮤턴트'라는 것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심도있게 다뤄진다.

사실 X-Men에서 뮤턴트들은 단순히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만화가 처음 등장했을때 부터 뮤턴트는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했다. 1963년의 미국 사회에선 그 약자가 바로 극심한 인종 차별을 당하던 흑인들이었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일반인들의 멸시를 받는 뮤턴트들에서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공평한 기회를 박탈 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짓밟혀야 했던 흑인들을 떠올리는 건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37년 뒤, 브라이언 싱어는 이 뮤턴트들을 스크린 위로 불러 모아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만든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의 목표는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었다. 그는 원작이 가진 사회적 메시지를 그대로 계승하길 원했고 뮤턴트들이 가진 초능력이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상징으로 비춰지길 바랐다. 

이런 이유로 X-Men 1, 2편은 주인공들이 가진 초능력의 화려함 보단 오히려 그것을 갖게 됨으로써 겪어야했던 역설적 아픔들에 초점을 맞췄다. 결론적으로 21세기의 뮤턴트들은 1963년의 흑인을 넘어 다양한 유색 인종, 소수 문화, 동성애자 등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마이너리티들을 상징하게 됐다.

브라이언 싱어가 뮤턴트들을 다루는 방식은 확실히 기존의 블록버스터 감독들과는 달랐다. 그는 뮤턴트들을 유랑극단의 신기한 괴물들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내면의 깊숙한 상처를 들춰보는 사람처럼 그의 행동은 조심스럽고 진지했다. 나는 최근에 와서야 이런 태도의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브라이언 싱어 자신이 유태인이자 동성애자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X-Men 1, 2는 아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연기자들은 빔을 쏘고 날아다니는 걸 즐기기 보단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인식에 집중했고 이는 원작 시리즈가 암시하는 뮤턴트들의 의미를 완벽히 반영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리즈의 3편에(X-Men: 최후의 전쟁, 2006) 이르러 완전히 반전되어 X-Men은 그저그런 액션 영화가 되고 만다. 전작의 영광을 위해 3년 뒤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이 개봉되지만 이 영화는 망가진 3편과 비교해봐도 처참할 정도의 재앙이었다. 이는 모두 브라이언 싱어가 슈퍼맨 리턴즈(2006)의 촬영을 위해 X-Men을 떠났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태의연하게 과거를 따져봐야 무슨 이득을 얻겠는가? 집나간 탕자는 돌아왔고 Box Office에선 부활한 X-Men이 기다리고 있는데!









X-Men 퍼스트 클래스에선 아쉽게도 전작의 오리지날 캐릭터들이 등장하진 않는다. 대신 파릇파릇 어린 뮤턴트들이 새로운 능력과 함께 등장한다. 그들은 에릭(매그니토)과 찰스(프로페서 사비에)의 도움으로 초능력을 발전시키고 X-Men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애 처음으로 동질감이라는 것도 느껴본다. 하지만 평화는 길지 않았다. 그들은 곧 중요한 삶의 기로에 들어선다. 돌연변이로 당당하게 살 것인가? 평생 능력을 숨기며 정상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에릭은 평화를 주장하는 찰스와 전쟁을 선언하는 자기 사이에서 고민하는 뮤턴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No more hiding.

남보다 우월한 능력을 평생 죄처럼 안고 살아가는게 뮤턴트들의 운명이다. 에릭은 이 운명의 사슬을 끊고, 돌연변이야 말로 인류 진화의 시작임을 증거하려 한다. 에릭은 묻는다. 네안데르탈인은 왜 멸종했나? 더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가 사라질 차례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영화는 뮤턴트들의 심리적 갈등과 그들에대한 정상인들의 공포를 드러내놓고 표현하면서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발한다. 나는 이 노골적인 표현이 어쩌면 현실 정치에서의 *진보와 **보수의 대결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더더욱 영화에 집중 할 수 있었다. 에릭이 혁명을 추구하는 급진 좌파라면, 찰스는 융화를 추구하는 중도 좌파랄까? 

혹시 전작을 보지 않아 망설이는 관객들이 있다면 그런 걱정일랑 하덜들 말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오는 순간, 당신은 시리즈의 전 편을 찾아 보고 싶은 마음에 온 몸이 근질근질해 질 것이다.


*진보: 뮤턴트와 그들을 지지하는 인간들.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집단.
**보수: 보통 인간들. 자신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진 집단에게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무지와 폭력으로 표출하는 집단. 쉽게 말해 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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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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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에는, 실로 모래를 마셔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현실감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대학 시절, 일본의 카프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정녕 '부조리'라는 말을 이해하고 싶었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아무도 빌려보지 않는 이 책을 손에 넣었다. 꽤나 진지하게 책장을 넘겼지만 끝내, 부조리가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이십 삼세의 일이다.

나는 이십 팔세에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이 곳에서 타인의 시선이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먹이를 미끼로 포획된, 거대한 개미굴의 일개미에 불과함을 경험한다. 어느날 나는 나에게 날개 한 쌍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작은 날개를 위태롭게 퍼덕이며 개미굴을 탈출한다. 도착한 곳은 벌들이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달콤한 벌집이었다. 나는 그곳에 정착해 새로운 나를 꿈꾼다. 붕붕 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고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법을 터득한 뒤 아름다운 꿀을 얻는 법을 익힌다.  

 

달콤한 꿀에 취해 비틀거리기를 몇 년, 어느날 혼미한 정신으로 날개를 퍼덕여 하늘로 날아 오르려는데 갑자기 천장에 부딪혀 떨어지고 만다. 여기에 이런 벽이 있었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또 하나의 개미굴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우스는 케익의 맛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맛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부조리를 안다는 것? 그게 지끈지끈 짜증을 유발하는 편두통이라면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 그건 마치 폐차장의 압착기 속에 들어가 형체도 없이 짜부러지는 것과 같다. 그 안에서 인간은 비명을 지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 
인간의 의지는 압착기의 암흑 속에서, 완전히 무력해진다.








성명 니키 준페이. 31세. 신장 1미터 58센티미터, 몸무게 54킬로그램. 딱히 나쁜 짓을 한 남자는 아니다. 곤충 채집을 좋아했다. 여지껏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모래 위를 기어다니는 길앞잡이속 좀길앞잡이를 잡으러 나왔다가 정작 자신이 모래 구덩이에 포획되어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니키 준페이를 함정에 빠뜨린건 모래 마을의 촌장이었다. 하룻밤 묵어 갈 장소를 마련해 준다며 할머니 혼자 사는 집으로 안내했다. 흔들리는 새끼줄을 타고 깊고 깊은 모래 구덩이 밑으로 내려가자 할머니가 다소 흥분한 듯한 기분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필요 이상으로 달뜬 모습이 뭔가 수상하기도 하지만, 아마 오랜만에 손님을 맞아 그럴게다. 가난한 마을. 내일 아침 수고료로 내밀고 가는 약간의 돈으로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집은 누추하기 짝이 없지만 섭섭치 않게 사례할 생각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등잔 위로 묘령의 여자가 얼굴을 들이민다. 할머니가 아니었다. 피부가 탱탱하게 하얀 여자. 흔들리는 등불 위로 어색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일부러 보조개를 보여주려는 것 같아,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다. (p. 34) 

 




 


다음날, 새끼줄 사다리가 사라졌다.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잠들어있는 여자를 깨워 다그친다. 진상은 대충 이렇다. 

이 마을에는 끊임없이 모래 바람이 불어온다. 팔분의 일 미리미터의 작은 모래 알갱이는 밤에도 결코 쉬는 법 없이 모래 구덩이를 덮쳐온다. 그대로 놔뒀다간 구덩이 안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파묻힌다. 이렇게 하나의 구덩이가 매몰되고 나면 다음은 옆 구덩이다. 물론 옆 구덩이 사람들은 이 때문에 두 배의 괴롭힘을 받는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감시당하며 오로지 모래를 치우기 위해서 살아간다.

준페이가 잡혀 들어간 모래 구덩이는 오랫동안 여자 혼자 감당해온 곳이다. 힘이 많이 부쳤다. 그러던 중 때마침, 여행객 차림의 젊은 남자가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세상엔 엄연히 법과 질서와 이성과 언론이라는 게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해 놓고 무사할 리 없다. 그러나 마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좋아, 그렇다면 파업이다. 내가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머지않아 이 마을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너희들이 지키고 있는 그 빈약한 풍경도 영원히 안녕이다. 

그런데 웬걸,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물과 식량을 배급해 주지 않는다. 아무리 기어 올라가 봐도 모래 언덕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바람에 섞인 모래가 입안과 몸 위에 성을 쌓는다. 푹푹 찌는 바다의 대기가 뽑아 낸 뜨거운 땀들이 그 위에 엉킨다. 딱 한 잔, 물 한 모금이 절실하다. 정신보다 육체가 먼저 붕괴된다. 남자의 파업은, 끝내 탈진에 굴복하고 만다.



 



한동안은 탈출을 시도해 보기도했다. 모래벽을 넘어서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추격을 피해 들어간 장소가 모래 지옥이었다. 한 번 빠지고 나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이봐 이런덴 동네 개도 얼씬하지 않는다고'

조롱이 감춰져 있는 마을 사람의 친근한 말투가 남자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떨어뜨린다. 준페이는 눈물로, 목숨을 구걸한다. 그 후로는 열심히 모래를 퍼날랐다. 신선한 공기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구역질 나는 모래 구멍에서 열심히 삽을 움직였다.

준페이는 처음에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부당한 처사를 당하면서도 아무런 불만없이 살아갈 수 있다니... 그러나 이제는 준페이가 더 열심이다. 어느새 여자와는 사실혼 관계가 되버렸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모래 위로 벌거 벗은 나체를 드러내는 여자. 그리고 그녀와 함께 추는 욕망의 춤. 심지어 준페이에게는 취미도 생겼다. 바늘에 물고기 반찬을 꿰어 까마귀를 잡는 함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희망에서는 썩은 반찬 냄새가 났다.

산다는건 원래 이런건가? 인간의 망각과 적응력에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난다. 탈출을 시도하던 용기는 어디 갔나? 뜨거운 모래를 씹으며 파업을 선언하던 인내는 어디로 갔나? 밤새 모래를 치우고 작열하는 낮 아래서 짧은 휴식을 취하는 두 마리 동물. 배급된 담배와 소주에 안식을 찾는 사람들. 

이렇게 살아가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난척 하지마. 사실 이곳에서 나간들 당신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삶이 뭐 그리 달라지겠어. 애초에 이 모래 마을을 찾은건 너 자신이었잖아. 당신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은밀한 꿈을 쫓아 이곳에 왔지. 그런데 이제 와서 탈출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착각을 하고 있는거야?




 



느날 모래의 여자는 자궁에서 피를 쏟으며 이불에 둘둘 말린채 모래벽 위로 올려진다. 친척이 수의사라는, 부락의 누군가가 자궁외 임신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여자가 떠난 뒤에도 새끼줄 사다리는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사다리 위를 올랐다. 이윽고 지상에 도착하자 준페이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대한 맛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앞에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는줄도 모르고 끝없이 얼굴을 꼬라박는, 더럽고 악취나는 똥파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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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포로 아크파크 1 : 기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아크파크 시리즈의 1권 '기원'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머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들을 아나니'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아직 이성의 족쇄에 풀려나지 못하는 나를 비웃으려는 듯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들로 견고한 성벽을 만들어 낸다.

이 수수께끼의 주인공은 물론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다. 줄여서 J.C. 아크파크, 아니 그냥 아크파크라 부르자. 그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유머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행정고시를 통과한 고위직인지 9급 말단에서 시작해 여전히 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행색과 주거형태를 봤을 때 말단직일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혹시 말단직이든 고위직이든 매일매일 공평하게 감내해야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건 누구나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 말은 누구나 '출근'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람쥐와 쳇바퀴? 뿡야!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 아니 아크파크도 일어나자마자 출근을 준비한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넘실거리는 인간의 파도 위로 아크파크도 겨우겨우 몸을 섞는다. 백과 흑으로만 그려진 건물과 사람들이 숨통을 조여오듯 컷들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시각적 질식을 위한 완벽한 시도! 

 

 

 

 가까스로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편지 한 통이 와 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게 인간의 운명이다. 아크파크도 이 편지를 열어 버린다. 편지 안에는 아크파크의 아침을 그대로 묘사하는 만화가 들어 있다. 그 만화의 제목은 '기원'.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묘사하는 만화를 그 날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받은 아크파크는 이 기묘한 사실을 파헤치기 위해 해결사 달랑베르 형제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속수무책. 심지어 기원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크파크의 세계에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아크파크가 편지 봉투에 들어있던 나머지 페이지들을 발견한다. 이 역시 '기원'이라는 만화책에서 찢어낸 것이 확실했으나 그것은 아크파크의 과거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페이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아크파크의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크파크는 실존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 직면한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쳇바퀴를 돌리던 다람쥐가 잠시 멈춰선다. '나'는 점점 익숙한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같은 인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뿌리째 뽑혀나가는 자아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옮겨 심으려 한다. 이런 이식의 방법으로는 단연코 종교에로의 귀의가 압도적이다. 신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는 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이렇게 외치고 나면 삶이 나가야 할 길은 명확해진다. 인간의 뇌에서 고민이 사라진다. 인식의 전환기, 세계와 존재의 근원으로 내려갈 수 있었던 일생일대의 기회가, 이렇게 맥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크파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다행히 종교를 찾지는 않았다. 아크파크는 나그네가 되기를 원했고 봉투에서 나온 자신의 미래를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만화가 예언이라면 아크파크의 이러한 거부 또한 예견되었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p. 25). 그리하여 그는 만화에서 예언된 27 페이지를 기다려 과연 예언대로 되는지 확인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예언은 곧 현실이 됐다. 

 

 

 

예언대로 따라 들어간 서점에서 아크파크는 이 기묘한 세계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청을 발견한다. 연구원들은 그곳에서 이 세계가(만화 '기원'의 세계) 사실은 어떤 만화(만화 속에서 파크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줬던 그 만화)와 똑 닮았을 거라는 가정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크파크의 '예정된' 방문은 이 같은 가정을 사실로 만드는데 완벽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대발견을 앞에 둔 연구청장 이고르 우프는 아크파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누군가 보낸 사절과 같소, 아크파크 씨! 당신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도 아마 존재할 수 없었겠지... 배경, 인물, 아무것도 없었을 거요.' (p. 34)

 

<기원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내 리뷰는 원래 이렇게 시작했다.

'난해한 책이다. 구매를 충동질하는 문장들로 글을 가득채우고 에둘러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쉽지 않다. 이 책을 읽는 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만큼 힘든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화를 반복해서 '읽을' 수록 이 책에 난해한 낙인을 찍어 서가 구석으로 밀어 넣는 건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성급한 판단으로 이 책의 미래를 결정짓기에는 만화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꿈의 포로 아크파크는 그 시작에서부터 다양한 철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미래를 향해 수상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미 한번 본 컷들이지만 이들과 다시 마주칠 때마다 하고싶은 이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게다가 불현듯 등장하는 실험적인 컷 구성은 독자의 뇌수를 파고드는 찌릿한 자극이 되기까지 한다. 

 

 

<구멍난 시간축을 통해 만화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다> 

 

 아크파크 시리즈 1권 '기원'은 원래 43 페이지까지 있었던 듯 보이나 42 페이지에서 그 43페이지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만화는 42페이지에서 끝나고 만다. 이어지는 새카만 페이지 위로 백색의 몇 글자가 도발적으로 떠오른다.  

 

 

 

아시다시피 2권은,
내 서가에 얌전히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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