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감독 롭 마샬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영화였다. 개성 이만점의 캐릭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유머, 비관습적인 액션 등 전작들이 쌓아온 DNA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 이 영화의 유일한 칭찬 거리는, 캡틴 잭 스패로우를 조니 뎁이 연기했다는 것 정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업적을 이토록 손쉽게 무너 뜨릴 수 있을까? 제리 브룩 하이머는 전시관의 유리를 깨고 더러운 쇠사슬을 걸어 명예의 전당에 잠들어 있는 전설의 블랙펄을 쓰레기 투성이의 바다위로 끌어내고야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냈더라도 그 본성은 역시 장사꾼에 지나지 않음을 천명한 사건이라고나 할까?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감독이 바꼈다.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독특한 코미디를 영화에 이식한 고어 버번스키가 다른 영화의 연출을 핑계로 떠나 버렸다. 물론 바톤을 이어 받은 롭 마샬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 남자의 데뷔작 '시카고'를 보라! 그러나 다음 작품 게이샤의 추억(2005), 최근작 나인(2009)에 이르기까지 롭 마샬은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남자에게 
시리즈의 새 기점이 될 중요한 작품을 맡기는게 옳은 결정이었을까? 롭 마샬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시대극과 모험영화'라고 했지만 개봉한 영화를 보면, 때로는 그냥 좋아하는 걸로 끝낼 일도 있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둘째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올랜드 블룸의 부재다. 심각했다. 지금까지 캐리비안의 해적은 윌 터너(올랜드 블룸),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잭 스패로우(조니 뎁), 이 세 사람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 이야기를 때로는 
미스테리로 또 때로는 액션 활극으로 풀어나가며 타이트한 긴장감과 볼거리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 익숙한 삼각 관계가 해체되고 나자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말 그대로 '낯선 이야기'가 되어 망망한 바다 위를 표류했다. 

나는 잭 스패로우와 새로운 적 
검은 수염, 그리고 소문난 인어가 쏟아내는 모험과 코미디를 기대하며 집중을 거듭했지만,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건 나를 아득한 꿈 속으로 빠뜨리는 강력한 수면제였다.

셋째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존재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새로운 여주인공 안젤리카 역을 맡았으며 안젤리카는 설정상 잭 스패로우와 애증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증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랑과 증오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과 증오의 사이다. 그래서 애증 관계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무게추를 따라 아슬아슬한 밀고 당기기를 해야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에서 잭 스패로우를 과감히 크라켄의 배때기로 밀어 넣은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을 보라. 그에게 수갑을 채우기 전에 보여준 엘리자베스 스완의 키스는 진심이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제는 죽어줘야겠어!' 안젤리카에겐 이런 느낌이 없다. 소리를 지르고 열심히 뛰어 다니지만 그녀는 그저 철없는 말괄량이를 연기할 뿐이었다. 잭 스패로우를 파멸시키기 위한 유혹,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애틋한 사랑, 안젤리카는 이 중 어느 것 하나 보여주지 못했다. 



                       





1984년 '나이트메어'로 데뷔한 이래 조니 뎁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결코 대중적인 배우는 아니었다. 이런 그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든 것이 바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다. 조니 뎁은 주목받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였고 
실제 삶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바로 그 경험을 잭 스패로우의 고독한 눈빛으로 표현해냈고 그를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당이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망나니로 만들어 냈다. 이렇게 탄생한 잭 스패로우가 낯선 조류에 휩쓸려 허우적 대는걸 보니 시리즈의 팬으로서 그리고 조니 뎁의 팬으로서,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낯선 조류'를 얘기하면서 인어 얘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 실망할까봐 미리 말해주면 인어는 별로 볼거리가 되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볼게 인어밖에 없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이 영화가 최악이었다는 얘기를 1980년대식 농담으로 표현한 거니 다가오는 주말을 위해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다행히 당신의 Box Office엔 쿵푸팬더2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라는 대안이 존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