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법정 영화를 말하자면, 예전에 박 대박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무려 1997년 작. 주현과 이정재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니, 이정재라고?  

한류 스타 욘사마, 헐리우드 키드 장동건, 글로벌 스타 비 등등 지금이야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빽빽히 들어찬 슈퍼 스타의 계보에 한자리 겨우 차지해 볼 수 있을 정도지만 그 때 당시 이정재의 인기는 대단했다. 1990년대엔, 아무래도 모래시계가 있었으니까.  

 

아, 사실 이 글이 박 대박과 이정재를 얘기하는 글은 아니다. 그나마 기억할 만한 법정 영화 이후 무려 14년. 한국 영화계에 괜찮은 법정 스릴러 한편이 나왔길래 그냥 옛 생각이 났을 뿐이다. 오늘 할 얘기는 손영성 감독의 2011년 작 '의뢰인'이다. 

의뢰인, 정말 괜찮은 영화다. 우선 법정 스릴러라는 영화 장르가 심상치 않다. 최근 지지부진했던 한국 영화계에 미풍 정도는 충분히 일으키고도 남을만한 파장이다. 사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계는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고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2003)이 개봉하고, 장르의 달인 김지운이 꽃을 피우고(장화 홍련, 2003) 걸출한 신인 최동훈(범죄의 재구성, 2004)까지 배출하는 등 급속한 질적 성장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이어지는 천만 관객 시대의 출현으로 양적인 팽창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한국 영화계의 르네상스였다.  

그러나 이후 기존 감독들의 지지부진과 이로 인한 관객의 외면이 이어지면서 한국 영화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던 와중 의외의 영화 추격자(2007)가 개봉했다. 비인기 장르임에도 500만이 넘는 선전. 하정우라는 '배우'의 탄생. 이걸로도 괜찮다 싶은 성과였지만 3년 뒤 황해(2010)가 개봉하자 드디어 칠흑같던 한국 영화계에 서광이 비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홍진을 진정한 작가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황해의 결말은 관객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호한 결말에 대한 히스테리적 거부반응, 잔인한 액션씬으로 인한 폭 넓은 지지 획득 실패!  

 

 

*(여기서 부터 굉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안 본 사람이라면 절대 읽지 마십시요.)  

황해와 비교해 볼 때 의뢰인은 비겁했다(물론 두 영화는 하정우가 나온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 비교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결말이 너무 명확하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원래 시나리오는 장혁의 유죄로 끝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감독 본인이 무죄로 수정했다. 사실 장혁이 유죄든 무죄든 연출적으로는 얼마든지 다양한 여지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바꾼 것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장혁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는다. 그리고 살인 현장으로 돌아와 피 묻은 침대 위에서 담배를 핀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어쩌면 장혁이 정말 아내를 살해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연출은 상황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야 했다. 관객을 좀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무죄 선고 후 박희순이 하정우에게 건넸던 말 한마디가 치명적이다.  

'한철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어'(영화를 보신 분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정황적 근거에 불과하니까 아직까지는 장혁을 진짜 살해범으로 인정할 만한 물증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뒷 얘기를 보고 있으면 완전히 맥이 풀린다. 영화에서 장혁을 범인으로 몰고가는 결정적 물증은 장혁이 아내에게 프로포즈를 할때 찍은 사진인데 그곳은 장혁이 아내가 죽기 몇 시간 전에 자동차 사고를 낸 곳이기도 하다. 이 자동차 사고는 영화내내 장혁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유일한 사건이었으나 영화 후반부 장혁의 프로포즈 사진과 연결되면서 그 신뢰도가 갑작스레 추락, 급기야 살인에 대한 물증으로까지 전락하고 만다. 전후 사정을 좀 더 따져보자.  

장혁은 아내가 살해되던 날 출장 근무 중이었다. 원래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 없었으나 공교롭게도 그 날은 두 사람의 결혼 기념일이었다. 평소 잦은 출장으로 불화를 겪던 장혁은 이 날만큼은 반드시 돌아가 아내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몇일 간의 밤샘 근무로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힘겹게 차에 올랐다. 하지만 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장혁은 졸다가 고속도로 진입점을 놓쳐 다른 길로 들어섰고 그 도로에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 사건은 아주 쉽다. 장혁이 그 도로에서 사고를 낸 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있다면 무죄. 왜냐하면 아내가 살해된 시점을 따져봤을 때 그 시각 교통사고를 당한 장혁이 아내를 죽일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프로포즈 사진의 비밀을 알아낸 뒤 부터 이 알리바이는 완전히 무너진다. 그 도로는 장혁이 처음 가본 길이 아니었다. 장혁은 길을 잘못 든게 아니었다. 장혁은 일부러 그 길에 들어섰다. 왜냐고? 살해한 아내의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서. 사건 당일로 돌아가 보자. 

장혁은 그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한 그는 아내를 살해한 뒤 사고가 났다고 주장한 국도로 길을 되짚어 온다. 그리고 교통 사고로 정신을 잃었다고 주장한 몇 시간 동안 아내의 시체를 유기했다. 장혁은 집 근처에 도착해 꽃과 케잌을 샀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해한 아내의 침대를 마주한다.  

고작 '한장의 사진'에서 도출된 이 대단한 추론은 장혁과 아내가 등장하는 플래시백으로 연출된다. 관객은 이 회상 장면에서 장혁이 이전에도 살인 경험이 있으며 심각한 싸이코패스라는 진실을 마주하고 그 사실을 눈치챈 아내를 태연히 살해하는 장혁의 모습을 본다. 영화는 이것이 바로 사건의 전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뢰인이 더 좋은 영화가 되기 위해선 여기에 함정을 만들어야 했다. 관객들은 장혁과 아내가 등장하는 플래시백=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회상 장면을 구성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사건의 전말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전지적 작가인가? 아니면 장혁을 범인으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인가? 만약에 후자라면 그 회상 장면은 철저히 오염된 거다. 하정우 자신도 장혁을 변호할 때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검사는 정확한 물증없이 정황적 근거 만으로 피고인을 살인범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그랬던 자신이 이제는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의뢰인을 공격하고 있다. 만약 영화가 장혁의 부인 살해 장면을 하정우, 박희순 등 이해 당사자의 추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었다면 이 영화는 좀 더 생각할 여지를 남겼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 앞에서 '네 개의 진실'을 말했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처럼 말이다.  

이 영화를 변호하기 위해 한 가지 기억을 되 짚어 보면, 회상씬 중 주목할 만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진입 금지 테이프가 어지럽게 붙어 있는 살해 장소. 바로 장혁의 집, 시각은 밤이었다. 그 때 갑자기 방에서 '살해당한 아내'가 나와 물인지 우유인지 모를 음료를 벌컥 벌컥 들이킨다. 논리적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단 한 컷. 이 컷이 왜 주목할 만한 장면일까?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이 한 컷이 지금껏 등장했던 회상씬을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보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을 잘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온다. 간단히 말해 이 컷은 영화에 나오는 모든 회상씬들이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그게 아니라면 회상씬들이 적어도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믿을만 하지는 못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거다. 돌이켜보면 장혁의 아내 살인 장면은 조명 톤이나 장소, 시각 등의 배경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그 씬과 정확히 일치한다. 

비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 의뢰인의 아쉬운 점은 바로 이 비약을 비약이 아니라고 방어할 만큼 충분한 읽을 거리를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 저것 두서 없이 얘기했지만 좋게 좋게 마무리 하면 의뢰인, 괜찮은 영화다. 법정 스릴러라고 하기엔 이야기가 어설프다느니 그 밀도가 헐겁다느니 비난의 말이 많고 그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8천원이 아깝지 않은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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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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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존재의 가벼움이 도무지 참을 수 없어 이 책을 썼다. 하지만 그 존재의 가벼움이 되려 무거운 바위가 되어 읽는 사람의 가슴에 내려 앉는건, 존재의 무게가 가진 최대의 아이러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눈 내리는 사막을 걷는 기분이 든다. 주변은 온통 반복되는 모래 언덕 뿐이다. 모래 언덕을 넘고 넘어 드디어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면 그 뒤에 펼쳐지는 것은 광활한 모래의 바다. 사막의 뒤에는 사막이 있다. 그런데 이 곳에 온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뜨거운 모래 위로 차가운 눈이 내린다. 발 밑에는 정신을 태우는 화염이요 머리 위는 온 몸을 굳게 만드는 얼음이다. 누울 수도 설 수도 돌아갈 수도 계속 갈 수도 없다. 막다른 골목이라면 힘껏 온 몸을 부딪혀 보기라도 하겠건만 이건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공허의 사막이다. 

 

 

소설 속에서 사막역을 맡은 것은 체코다(그 당시 체코 슬로바키아). 1960~70년대의 체코라고 생각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 지구. 강력한 소비에트 연방의 힘으로 동유럽은 온통 공산화 된다. 그러나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비에트 연방의 적색기는 결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고 싶은 추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한 남자의 가면이었다. 그는 이 적색기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나라를 유린한다. 

체코의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정치 계획을 발표하고 개혁에 착수했다. 언론과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경제면에서는 시장 경제와 통제 경제가 적절히 혼합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프라하의 봄'이다. 시덥잖은 드라마의 제목이 아닌 것이다. 

체코에서 불어오는 봄기운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프라하의 봄은 공산 주의를 수술하려는 날카로운 메스 같았다. 소련은 체코의 국경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개혁을 중지하거나 제약하려는 목적.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다. 1968년 8월 20일 밤, 20만명의 군대와 2,000대의 탱크가 체코의 국경을 넘었다. 8월 21일 아침, 체코는 완전히 점령당했다. 

개혁 정치를 시작했던 둡체크와 정치인들이 모스크바로 체포되었다. 애시당초 둡체크를 실각시키려는 소련의 목적은 체코의 저항이 광범위해지자 당초의 계획을 포기했다. 둡체크는 극심한 심리적 압박감 속에서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한다. 체코로 돌아와 굴욕적인 연설을 했다.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둡체크와 당시 소련 수상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이 책의 주인공 프란츠와 사비나와 테레자와 토마시가 바로 이 시대에 살았다(밀란 쿤데라의 시대기도 하다). 굴욕의 시대였고 천박한 시절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던 40대의 소설가 얀 프로하즈카는 체제를 비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언론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소설가를 씹어 먹었다. 그럴수록 얀 프로하즈카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 더해갔다.  

어느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프로하즈카와 한 대학 교수가 나눈 사적인 대담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대담 속에는 소설가가 그의 친구들을 비웃는 대목이 여럿 있었다. 방송은 특히 둡체크를 비웃는 대목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애썼다. 대화는 집안에 설치된 도청기에 의해 녹음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인간의 권위와 사생활을 유린한 비밀 경찰의 야비함보다 그들이 사랑했던 소설가를 더욱 미워했다. 굴욕의 시대였고, 천박한 시절이었다. 

이런 세상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건 말 그대로 인간이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일 수 있을 때는 서로를 신뢰하고 있을 때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을 때다. 하지만 프란츠와 사비나와 테레자와 토마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실력있는 외과 의사였다. 토마시는 첫 번째 아내와 결혼하기 전과 후 그리고 심지어 결혼 기간 중에도 수 많은 애인을 갖고 있었다. 토마시는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기 전과 후 그리고 심지어 결혼 기간 중에도, 역시 수 많은 애인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아내는 테레자였다.  

토마시는 섹스와 사랑은 별개라고 말했다. 테레자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테레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소련의 침공 후 제네바로 도피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테레자는 체코에 남기로 했다. 제네바에 홀로 도착한 토마시는 얼마 후 체코로 되돌아 온다. 토마시는 체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마음으로 부터 울려 퍼지는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래야만 하는가?' 토마시가 대답한다. '그래야만 한다!'  

토마시는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테레자가 나와 토마시를 만났다. 테레자는 토마시가 체코로 돌아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토마시는 체코로 돌아온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귀향을 후회하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 

프란츠는 저명한 대학교수로서 아내를 배반하고 제네바에 애인을 갖는다. 사비나는 체코 시절에 토마시가 사랑한 수 많은 애인 중 하나였으나 제네바에서는 프란츠의 애인으로 살아간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했지만 사랑이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군인'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장이 해제된 채로, 온 몸을 내 맡긴 뒤 '언제 공격당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에 떠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  

프란츠는 아내 마리클로드를 찾아가 이혼을 통보한다. 애초에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다. 프란츠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경제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프란츠는 아내에게 모든 재산을 양보한다. 프란츠에게는 사비나만이 삶의 무게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 외의 모든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리클로드는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란츠는 마리클로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리클로드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프란츠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영원한 투쟁'이라고도 말했다. 프란츠는 자신에게는 싸울 마음이 털끝 만큼도 없다고 소리 쳤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만나러 제네바로 갔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하며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 프란츠는 완벽한 미래를 꿈꾸며 사비나의 아틀리에를 나섰다. 사비나는 그날 밤 파리로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토마시와 테레자와 프란츠와 사비나의 세계는 그 밀접한 육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몰이해의 향연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몰이해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적극적 해명은 이 세상의 무게를 재는 천칭의 한 쪽 편에 자신의 존재를 올려 놓는 것이다. 천징의 다른 한 쪽에는 거대한 똥 무더기가 올려져 있다. 존재의 합은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고 더해 보아도, 결코 똥 무더기의 무게를 이길 수 없다. 해명은 무의미한 것인가? 무의미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 스물 한살 때일 것이다. 그 때 난 온 몸을 강타하는 허무의 박력에 한 동안은 넋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허무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 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럼 이제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허무란 사방에 가득 차 있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걸 두 손으로 꼭 쥘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얼굴을 똑똑히 마주할 수 있다면 그걸 허무라 부를 수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슴 속에 가득 들어찬 빈 공간이다. 빈 공간이기에 손으로 꽉 잡아 내던져 버릴 수도 없고 또 이미 그것으로 가득찬 가슴이기에 다른 것을 채워 넣을 수도 없다. 허무를 아는 사람들은, 이처럼 공허한 포만감으로 가득찬 채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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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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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분되는 프로이트의 2차 정신 기구 모델은 후계자들의 격렬한 의견 대립을 통해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분화된다. 하나는 생명의 본질을 이드에서 찾으며 인간이란 이드, 자아, 초자아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실체라는 주장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아의 자율성과 방어 기능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정신분석은 결국 자아의 강화와 이를 통한 현실 적응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프로이트의 여섯 번째 딸 안나 프로이트고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자크 라캉이다. 

 

상계 

라캉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상상계로 지칭하는데, 이는 이 세계가 가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미지를 매개로 이뤄진다는 말이다. 라캉은 이를 '거울 단계'의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거울을 처음 본 어린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나'를 알아본다. 이 때가 바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최초로 인식하는, 즉 자아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나'라는 정체성이 나를 비춘 '대상'을 통해 밝혀진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한낱 이미지에 불과한 대상을 통해 나를 인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진짜 나'의 소외를 초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진정한 '나'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자아는 대상화된 '나'를 통해 인지되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이며 수 많은 오해의 씨앗이 심어진 불완전의 토양이다. 

 

한편 '나'의 이미지에 매료되는 거울 단계의 매커니즘은 나르시즘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자아의 발견은 안정된 자기 인식의 시작이 아니라 '진짜 나'와 '나를 비추는 이미지' 사이의 분열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를 비추는 이미지'는 그 특성상 완벽한 이상향을 지향하면서 실제의 '나'와의 괴리를 가속화 하는데 그 이유는 거울 단계에서 지각되는 신체적 미숙함이 원인이다.  

실제로 생후 6개월~1년 된 아이는 운동 신경의 발달이 미숙해 아직 자신의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며 몸이 주는 감각들도 파편화된 형태로 느낀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은 이상화된 전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몸이 보여주는 완벽한 조화에 환호하면서 끌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이미지에 끌리면 끌릴수록 아이가 느끼는 실제 몸의 현실은 완벽한 자아의 상에 균열을 낳는다. 이렇듯 실제 몸의 불완전성과 이미지의 완벽함이 최초의 분열과 불안을 낳으면서 자아의 일체감을 위협하는 게 거울 단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때 불완전한 육체와 이상적 이미지를 봉합하는 것이 바로 나르시즘이다. 나르시즘은 '완전'에 대한 욕망으로 철저히 이상화된 자아를 만들어내지만 대상화된 자아의 불완전함은 엄연한 현실이다. 나르시즘은 우리를 환상 속에 가둬두려는 마술의 집이다. 환상은 컴컴한 암막이 되어 현실을 가려 보지만 실제와 환상 사이의 균열은 점점 커져만 가고 그 안에선 썩은 내가 풍겨 나온다.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결국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썩은 내를 풍기는 나르시즘의 불길한 묵시록이다. 

상징계 

대상화된 자아가 속하는 곳이 상상계라면 실제 주체가 거하는 곳이 바로 상징계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란 곧 '말하는 주체'다. 따라서 상징계는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는데 라캉은 소쉬르의 기호론을 차용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기서 부터 두 손을 들었다. 소쉬르의 기호론이라는게(시니피에-시니피앙의 관계를 설명하는) 절대 쉬운 개념이 아닌데 여기다 라캉의 새로운 생각까지 덧붙여 지니 이건 완전히 암흑이다. 중요한건 시니피앙(기표: 말해지는 것. 단어를 발음과 의미로 나눌 수 있다면 그 중 발음에 해당하는 것이 시니피앙이다.)이 자율적, 독자적으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정해지는 방식은 결국 상상계에 의존하기 떄문에 결국 주체는 소외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좀 더 들어가보자. 

라캉의 언어론에서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라캉은 둘 사이에 거대한 가로막 하나를 질러 놓고 위에는 시니피앙을 아래에는 시니피에를 위치시키는데 시니피에는 이 가로막에 막혀 끝없이 침잠한다. 이때 시니피앙은 시니피앙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쇄 사슬을 구성하는데 이 연쇄사슬이 바로 언어의 체계다. 이 때문에 언어의 체계는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니피앙 간의 구분은 단순히 말(발음)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자'라는 시니피앙은 '남자'라는 시니피앙을 만나 서로 구분된다. '여자'를 '여자'이게 만드는 것은 '남자'를 포함한 다른 모든 시니피앙들이 '여자'와는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이다. 시니피앙은 이렇게 상호 구분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립한다.  

하지만 소리만 가지고는 의사소통이란 것이 이뤄질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발생시키는 소리의 다름을 통해 의미의 다름을 인지하는데 이는 소리가 특정 의미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이론에서 이 소리와(시니피앙) 의미(시니피에)의 만남을 주재하는 것이 바로 '주체'다. 문제는 이 주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라는 단어가 사전적으로 생물학적인 여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수 십차례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경험한 남자라면 여자를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여자라는 단어에서 어머니의 풍요로움과 따뜻함을 느낄 때 이 남자는 가슴을 찌르는 한기를 느낄 것이다.  

이처럼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와 일대 다 심지어 다대 다로 결합하면서 고정된 실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확실한 '나', '절대적인 기준'의 부재는 '이것이 진짜 주체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이것은 상징계의 구성 조차 상상계의 근본적 결함인 오인 구조를 - 대상화된 자아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주체는(진짜 주체) 상징계에서조차 소외 당한다.  

사실 상징계에 대한 설명은 이후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책은 상징계를 '선험적 질서로서 주체를 벗어나는 타자의 영역'이라고 설명하고 '이를 상상계의 소타자와 구별하여 대타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며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핵심 이론이 전개되는데, 나는 '선험적 질서로서 주체를 벗어나는'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 시니피앙와 시니피에의 관계 - 그것이 왜 '타자의 영역'이 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어 결국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지는 핵심 이론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이렇듯 알쏭달쏭 장님 문고리 잡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느낀 바가 있어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라캉의 이론 중 현대인의 실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론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거울 단계의 매커니즘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명석판명하게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무언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사실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라든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체와 자아(대상화된 주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나-타자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내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네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수 많은 인간들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안되겠다. 한 마디만 더 하자.  

나-타자의 관계에서 타자란 '대상화된 주체'를 의미하지만 말 그대로 '타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아를 확인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형상이 자신을 그대로 흉내내는 허구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어른의 세계에서 거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타자, 나와 더불어 사회, 문화를 형성하고 관습과 질서에 순종하는 타인을 의미한다. 

확실히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비춰진 나의 모습을 통해 나를 확인한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 질지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이 사회를 살아간다. 중요한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근본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추구한다. 동창회에 들고 나간 싸구려 백을 은근 슬쩍 가리게 되는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는 루이비통과 에르메스와 샤넬의 욕망이 싹 튼다. 그러나 그 욕망의 씨앗은 '나'로 부터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곳으로 부터 뿌려진다.  

문화와 관습의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는 인간의 일탈을(진짜 '나'를 찾는 행위) 감시하는 거대한 감옥이다. 우리는 감시자를 자청하며 서로의 욕망을 서로에게 투영한다. 이 안에 진짜 나는 없다. 

 

실재계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 구조화 된다. 이 말은 상징계에 진입한 인간이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추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를 매개로 세상을 추상'한다는 말 속에는 결코 언어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 매개는 그저 매개일 뿐이다. 언어 자체가 실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마치 언어 때문에 이 세계가 존재하고 언어가 아니면 실재를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언어와는 무관하게 실재는 우리 눈 앞에 존재한다. 우리의 우주가 고작 언어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야 태어날 수 있었던 부차적 개념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구름을 연기라고 말하든 나무라고 말하든 구름은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위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구름이란 말에는 구름의 실재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납득할 만한 설명 아닐까?  

그렇다. 언어는 세상을 해설하는 도구일 뿐 결코 이 세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해설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느끼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그리고 듣는 사람의 지식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따라서 언어와 실재와의 관계는 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실재에 드리워진 거대한 장막이다.  

라캉의 실재계는 언어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보드라운 속살을 말한다. 상징계는 끊임없이 이 속살을 사진 찍어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만 그것이 언어라는 암실을 통과하는 순간 빛바랜 흑백 사진이 되버리고 만다. 그러나 흑백 사진에서 드러난 '색'의 결여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색'의 실재를 확신하게 만든다. 누가 그랬던가?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다름아닌 부재라고! 

 

우리의 욕망이란 결국 결여된 것을 채우려는 갈망, 어두운 장막을 들춰내고 실재에 가 닿으려는 간절함이다. 하지만 실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는 이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소망하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눈을 감고 싶지만 부정의 강도가 높아갈 수록 존재의 크기는 커져만 간다. 그래서 또다시 욕망의 돌을 굴린다. 시지포스의 형벌은, 아마도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은유한 것이리라. 

무의식과 실재 

실재는 상징계의 작용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고요한 화산 밑에서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실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길 갈망한다. 그렇다면 이 화산을 폭파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말장난 같지만, 실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글은 절대 그 방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실재의 끝자락이라도 잡아 그 모습을 글로 옮기려 하지만 손 끝으로 타자를 누르는 순간 실재는 언어의 어두운 장막에 가려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래도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화 되지 못한 것 논리적이지 못한 것 비언어적인 것이 우리의 실재다. 꿈에서 겪은 기괴한 이야기, 마음 속 깊숙히 숨어 있는 원초적 욕망들이 바로 우리의 실재다. 

식의 흐름 기법이나 초현실주의 화법의 작품들이 범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표현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은 그들이 미치광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를 직관하는 초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드'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담고 있는 원초적 에너지 덩어리라면 라캉의 실재가 자리하는 곳이 바로 무의식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실재는 존재한다. 우리는 끝까지, 이 실재를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실재는 영원히 우리 앞을 배회할 뿐이다. 

 

 

 

캉과 프로이트, 그리고 지식인마을 시리즈 

프로이트가 어려운건 정평이 난 사실이지만, 그래도 프로이트의 저작 몇 권을 훑어 본 뒤 내리는 판단에 따르면, 라캉이야 말로 난해의 극치다. 평생 정신과 의사로서 임상에 근거한 정신 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철학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세련되게 다듬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난해함은 배가 되었다.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개념의 문제라기 보다는 일종의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부모에 대한 성애와 거세 컴플렉스를 근간으로 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 인간의 모든 삶을 성적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  

반면 라캉은 개념 자체가 너무나 어렵다. 실재계와 상징계의 대립은 수 천년간 철학계를 전쟁터로 만들어 온 관념론-유물론의 대립을 연상케 하며 '실재(존재)의 드러냄' 같은 개념은 악명 높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떠올리게 한다. 고작 한 권의 책으로 라캉을 판단하기엔 이를 수 있지만, 어쨌든 내 첫 느낌은 그렇다.  

정신 분석학이 흥미로운 분야인 것은 사실이지만 책 한 권을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앞으로 이 분야의 책을 선뜻 집어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참,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게 하나 있는데, 그렇다고 이 책 자체가 어렵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지식인마을 시리즈의 모든 책이 그렇듯 아주 친절하고 쉽게 씌여져 있다. 이런 책을 내준 김영사에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정신 분석학은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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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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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글 길이 탓에 부득이 하게도 두 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온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근친에 대한 성욕을 인간의 본성으로 설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역겨움을 선물했다. 남자 아이의 
성장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벌이는 성적 전쟁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 성적 전쟁을 성인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시작된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사랑은 성인 남녀의 충동적 욕망과는 다르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육체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면서 애정을 갈구하는 생존 본능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영원히 소유하려 하지만 둘 사이에 아버지가 개입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지만 아버지의 권위와 힘에 억압되어 자신의 감정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때 아버지의 권위는 '거세 컴플렉스'라는 형태로 다가오는데 이것은 아이가 여성과 남성의 해부학적 차이를 점점 인식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성기가 없다는 것을 본 남자 아이는 거세에 대한 아버지의 위협이 실현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아이는 어머니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점차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한 명의 독립적인 남성으로 규정한다. 

한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아버지의 권위로 대표되는 각종 사회적 규범, 관례, 질서, 금지를 수용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 이것은 남과 더불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극복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준비가 됐다는, 일종의 인생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차지하겠다는 실제적 욕망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기 아이들이 최초로 경험하는 억압을 설명하는 장치일 뿐이며 하나의 생명이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해설하는 모델일 뿐이다.  

이드, 자아, 초자아 

이드, 자아, 초자아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함으로써 나타나는 분열된 인격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이는 사회적 질서와 금지를 수용함으로써 사회화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서와 금지의 수용이 욕망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사회적 터부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욕망들을 강력하게 억압하여 마음 속 깊이 가둬버린다. 통제되지 않은 정념과 의지의 집합소. 심해처럼 어두운 마음의 근원. 이것이 바로 이드다. 

이렇게 보면 이드란 절대 열어봐선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 더럽고 무서운 역병의 소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간의 삶은 대부분 이드가 발현하는 욕망을 원료로 움직인다. 인간은 먹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음식을 섭취하고 자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휴식을 취하며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열심히 일한다. 인간 활동의 근원은 모두 욕망이다. 

이드가 굶주린 늑대라면 자아는 교활이다. 자아는 무제한의 쾌락원리를 추구하려는 이드가 세상과 부딪히면서 점차 현실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서 분화한다.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굶주린 늑대가 식욕을 채우기 위해 광장으로 뛰쳐 나갔다고 상상해보자. 

처음에 늑대는 광장에 깔린 무수한 인간들을 아무나 잡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늑대의 공격을 방어한다. 일부는 막대기를 휘두르고 또 일부는 돌을 던지며 소리친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달은 늑대는 기가막힌쇼를 준비한다. 늑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꼬리를 흔들며, 마치 개처럼 애교를 핀다. 사람들의 손을 핥고 그 앞에서 배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 귀여운 늑대에게 먹이를 던져준다. 

이처럼 늑대를 개로 변장시키는 것이 바로 자아다. 자아는 이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실 원칙을 받아들여 이드의 욕망을 통제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통제는 심각한 욕구 불만을 일으켜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기에 자아는 그 욕망을 현실 조건 안에서 분출할 수 있는 법을 궁리한다. 이 때문에 욕망은 때때로 지연되거나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할 경우 꽤 오랫동안 억압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욕망의 에너지는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욕망은 자아의 빗장을 부수고 스스로 탈출한다. 사람들이 갑작스레 보이는 폭력 행위나 뜬금없는 기행동은 이처럼 빗장을 부수고 탈출한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자아가 현실 세계와 이드를 오가며 끊임없이 타협안을 내놓는 정치인이라면 초자아는 광기어린 독재자다. 초자아의 기원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면서 등장했던 아버지의 권위와 위협인데, 여기서 아버지란 닮고 싶은 대상인 동시에 처벌하는 자다. 이 때문에 초자아 또한 '이상적 자아'로서의 역할과 '양심의 근원이자 감시자'로서의 역할로 분화된다. 

 

 

인간은 초자아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며 초자아가 부과하는 이상적 자아를 닮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초자아는 금지를 양심과 도덕으로 자리잡게 함으로써 인간의 맹목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그 표현 방식을 감시하고 비판하게 만든다. 얼핏 초자아는 빡빡한 규율과 통제만을 강요하는 철저한 이성의 왕국으로 보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드와 접촉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모든 독재자들은 자신의 독재가 어디까지나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드의 어두운 욕망은 이 착각의 틈을 비집고 스며든다.  

우리는 폭력과 광기가 신념과 이상에 의해 정당화되는 사례를 수 없이 봐왔다.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따르려는 숭고한 신앙심으로부터 발발했다. 선을 쫓고 악을 멀리하라고 가르쳤던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아귀가 되어 이교도의 육체를 짓밟는다.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이 더러운 정당화가 죽음을 순교로 학살을 정의로 바꿔 놓는다. 한편 조국과 민족에 충성하라는 국가적 이념은 카미카제의 제로센에 탑승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쳐넣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초자아가 이드와 결합할 때의 특징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간의 행동이 잔인해 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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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과 책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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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지럼증과 함께 심한 두근거림을 느낀다.  

보르헤스가 그려내는 비상식적인 세계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던 세계를 송두리째 갈아 엎는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과 공간의 절대성이 보르헤스의 필치 앞에선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보르헤스를 읽는다는 것은 친모와의 안녕을 고함과 동시에 바로 계모를 받아 들여야만 하는 충격적 상황과 마주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충격은 그 내용에만 있는게 아니다. 나는 프로이트를 읽으며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보르헤스를 읽고 있으면 나의 모국어가 스페니쉬(Spanish)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인이며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을 공용어로 한다).  

독자를 절망 속으로 빠뜨리는 건 보르헤스의 모호한 알레고리이며 동시에 그 알레고리 앞에서 갈팡 질팡,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번역이다. 우리는 이렇게 알레고리와 번역의 사이에서 두 번의 절망을 맞는다. 이제 이 절망들은 보르헤스 포기를 종용하는 암묵적 메시지가 된다. 평생 단편만을 고집하여 결코 두꺼운 법이 없는 보르헤스의 책들은, 그렇게 우리 손을 떠나 영영 찾을 수 없는 바벨의 도서관에 보관된다. 

보르헤스 세계의 특징은 상호 반영을 통한 이미지의 무한 복제다. 쉽게 마주보고 있는 거울을 생각하면 된다. 거울이 서로를 비추며 무한의 이미지를 반복하듯이 보르헤스는 '세상의 만물이 그려진 지도', '모든 책이 씌인 책' 등으로 세계를 언어화 한다. 만물이 그려진 지도라든가 모든책이 씌인 책은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일 수 밖에 없는 패러독스를 잉태하므로 그의 문학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라든가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돈키호테' 같은 기이한 불확실성을 마음껏 유희한다. 보르헤스는 이 책의 열 번째 챕터 '돈키호테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마술성'의 마지막을 칼라일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1833년에 칼라일은 말했다. 우주의 역사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쓰고 읽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 스스로가 묘사되어지고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한 권의 책이라고. 

<듀안 마이클> 

보르헤스의 또 다른 특징은 끊임없는 이야기와 인용 그리고 그에 따른 방대한 주석이다. 보르헤스는 엄청난 독서가였다. 39세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겪은 뒤 거의 실명 상태로 지내왔음에도 그는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살아 생전에 읽었던 책은 거의 2만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르헤스의 글엔 엄청나게 많은 인용구와 책과 작가들이 등장한다. 마치 20세기의 '세헤라자드'가 된 듯이 보르헤스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끼워 넣고 책 속에 책을 삽입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방대한 주석이 뒤따른다.  

주석이란 보통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나 편집자가 추가하지만 보르헤스의 경우 작자인 자기 자신이 많은 양의 주석을 추가한다. 독자는 이처럼 방대한 주석 앞에서 비선형적 독서를 경험한다. 우리는 여타의 책을 읽어 나가듯 정해진 순서에 따라 편안히 책장을 넘길 수 없다. 독자는 본문을 읽은 뒤 주석을 찾고 때때로 이를 따라 다음장으로 이동하지만 이내 끊어진 본문을 찾아 다시 앞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현대의 하이퍼텍스트를 닮아 있다. 특정한 줄거리의 탐색없이 'Back', 'Forward'를 연발하며 정보를 탐색하듯이 보르헤스의 독자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조각을 찾아 부유한다.  

<에셔>

 

'만리장성과 책들'은 보르헤스의 산문집이다. 일기를 암호로 쓰는 사람이 없듯이 보르헤스의 산문은 그의 소설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 문학의 원형과 그 원형이 창조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볼 수 있기에 그 동안 그의 소설을 읽으며 불편해 했던 독자들은 한층 더 가까이 보르헤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쉽다'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방대한 독서, 무한의 지식, 그리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 차원의 비평들. 인간이란 딱 아는 만큼만 보이기 마련인데 설령 이름이 익숙한 오스카 와일드나 나다니엘 호손을 평했다 한들 이제 막 지식의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네 눈 높이에 보르헤스의 사상이 그 털끝 만큼도 보일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읽었으나 읽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읽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금의 내 심정과, 이렇듯 얼렁 뚱땅 글을 마쳐야만 하는 내 무력함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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