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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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글 길이 탓에 부득이 하게도 두 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온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근친에 대한 성욕을 인간의 본성으로 설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역겨움을 선물했다. 남자 아이의 
성장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벌이는 성적 전쟁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 성적 전쟁을 성인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시작된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사랑은 성인 남녀의 충동적 욕망과는 다르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육체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면서 애정을 갈구하는 생존 본능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영원히 소유하려 하지만 둘 사이에 아버지가 개입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지만 아버지의 권위와 힘에 억압되어 자신의 감정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때 아버지의 권위는 '거세 컴플렉스'라는 형태로 다가오는데 이것은 아이가 여성과 남성의 해부학적 차이를 점점 인식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성기가 없다는 것을 본 남자 아이는 거세에 대한 아버지의 위협이 실현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아이는 어머니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점차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한 명의 독립적인 남성으로 규정한다. 

한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아버지의 권위로 대표되는 각종 사회적 규범, 관례, 질서, 금지를 수용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 이것은 남과 더불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극복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준비가 됐다는, 일종의 인생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차지하겠다는 실제적 욕망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기 아이들이 최초로 경험하는 억압을 설명하는 장치일 뿐이며 하나의 생명이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해설하는 모델일 뿐이다.  

이드, 자아, 초자아 

이드, 자아, 초자아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함으로써 나타나는 분열된 인격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이는 사회적 질서와 금지를 수용함으로써 사회화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서와 금지의 수용이 욕망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사회적 터부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욕망들을 강력하게 억압하여 마음 속 깊이 가둬버린다. 통제되지 않은 정념과 의지의 집합소. 심해처럼 어두운 마음의 근원. 이것이 바로 이드다. 

이렇게 보면 이드란 절대 열어봐선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 더럽고 무서운 역병의 소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간의 삶은 대부분 이드가 발현하는 욕망을 원료로 움직인다. 인간은 먹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음식을 섭취하고 자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휴식을 취하며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열심히 일한다. 인간 활동의 근원은 모두 욕망이다. 

이드가 굶주린 늑대라면 자아는 교활이다. 자아는 무제한의 쾌락원리를 추구하려는 이드가 세상과 부딪히면서 점차 현실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서 분화한다.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굶주린 늑대가 식욕을 채우기 위해 광장으로 뛰쳐 나갔다고 상상해보자. 

처음에 늑대는 광장에 깔린 무수한 인간들을 아무나 잡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늑대의 공격을 방어한다. 일부는 막대기를 휘두르고 또 일부는 돌을 던지며 소리친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달은 늑대는 기가막힌쇼를 준비한다. 늑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꼬리를 흔들며, 마치 개처럼 애교를 핀다. 사람들의 손을 핥고 그 앞에서 배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 귀여운 늑대에게 먹이를 던져준다. 

이처럼 늑대를 개로 변장시키는 것이 바로 자아다. 자아는 이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실 원칙을 받아들여 이드의 욕망을 통제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통제는 심각한 욕구 불만을 일으켜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기에 자아는 그 욕망을 현실 조건 안에서 분출할 수 있는 법을 궁리한다. 이 때문에 욕망은 때때로 지연되거나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할 경우 꽤 오랫동안 억압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욕망의 에너지는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욕망은 자아의 빗장을 부수고 스스로 탈출한다. 사람들이 갑작스레 보이는 폭력 행위나 뜬금없는 기행동은 이처럼 빗장을 부수고 탈출한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자아가 현실 세계와 이드를 오가며 끊임없이 타협안을 내놓는 정치인이라면 초자아는 광기어린 독재자다. 초자아의 기원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면서 등장했던 아버지의 권위와 위협인데, 여기서 아버지란 닮고 싶은 대상인 동시에 처벌하는 자다. 이 때문에 초자아 또한 '이상적 자아'로서의 역할과 '양심의 근원이자 감시자'로서의 역할로 분화된다. 

 

 

인간은 초자아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며 초자아가 부과하는 이상적 자아를 닮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초자아는 금지를 양심과 도덕으로 자리잡게 함으로써 인간의 맹목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그 표현 방식을 감시하고 비판하게 만든다. 얼핏 초자아는 빡빡한 규율과 통제만을 강요하는 철저한 이성의 왕국으로 보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드와 접촉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모든 독재자들은 자신의 독재가 어디까지나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드의 어두운 욕망은 이 착각의 틈을 비집고 스며든다.  

우리는 폭력과 광기가 신념과 이상에 의해 정당화되는 사례를 수 없이 봐왔다.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따르려는 숭고한 신앙심으로부터 발발했다. 선을 쫓고 악을 멀리하라고 가르쳤던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아귀가 되어 이교도의 육체를 짓밟는다.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이 더러운 정당화가 죽음을 순교로 학살을 정의로 바꿔 놓는다. 한편 조국과 민족에 충성하라는 국가적 이념은 카미카제의 제로센에 탑승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쳐넣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초자아가 이드와 결합할 때의 특징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간의 행동이 잔인해 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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