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법정 영화를 말하자면, 예전에 박 대박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무려 1997년 작. 주현과 이정재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니, 이정재라고?  

한류 스타 욘사마, 헐리우드 키드 장동건, 글로벌 스타 비 등등 지금이야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빽빽히 들어찬 슈퍼 스타의 계보에 한자리 겨우 차지해 볼 수 있을 정도지만 그 때 당시 이정재의 인기는 대단했다. 1990년대엔, 아무래도 모래시계가 있었으니까.  

 

아, 사실 이 글이 박 대박과 이정재를 얘기하는 글은 아니다. 그나마 기억할 만한 법정 영화 이후 무려 14년. 한국 영화계에 괜찮은 법정 스릴러 한편이 나왔길래 그냥 옛 생각이 났을 뿐이다. 오늘 할 얘기는 손영성 감독의 2011년 작 '의뢰인'이다. 

의뢰인, 정말 괜찮은 영화다. 우선 법정 스릴러라는 영화 장르가 심상치 않다. 최근 지지부진했던 한국 영화계에 미풍 정도는 충분히 일으키고도 남을만한 파장이다. 사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계는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고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2003)이 개봉하고, 장르의 달인 김지운이 꽃을 피우고(장화 홍련, 2003) 걸출한 신인 최동훈(범죄의 재구성, 2004)까지 배출하는 등 급속한 질적 성장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이어지는 천만 관객 시대의 출현으로 양적인 팽창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한국 영화계의 르네상스였다.  

그러나 이후 기존 감독들의 지지부진과 이로 인한 관객의 외면이 이어지면서 한국 영화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던 와중 의외의 영화 추격자(2007)가 개봉했다. 비인기 장르임에도 500만이 넘는 선전. 하정우라는 '배우'의 탄생. 이걸로도 괜찮다 싶은 성과였지만 3년 뒤 황해(2010)가 개봉하자 드디어 칠흑같던 한국 영화계에 서광이 비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홍진을 진정한 작가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황해의 결말은 관객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호한 결말에 대한 히스테리적 거부반응, 잔인한 액션씬으로 인한 폭 넓은 지지 획득 실패!  

 

 

*(여기서 부터 굉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안 본 사람이라면 절대 읽지 마십시요.)  

황해와 비교해 볼 때 의뢰인은 비겁했다(물론 두 영화는 하정우가 나온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 비교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결말이 너무 명확하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원래 시나리오는 장혁의 유죄로 끝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감독 본인이 무죄로 수정했다. 사실 장혁이 유죄든 무죄든 연출적으로는 얼마든지 다양한 여지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바꾼 것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장혁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는다. 그리고 살인 현장으로 돌아와 피 묻은 침대 위에서 담배를 핀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어쩌면 장혁이 정말 아내를 살해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연출은 상황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야 했다. 관객을 좀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무죄 선고 후 박희순이 하정우에게 건넸던 말 한마디가 치명적이다.  

'한철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어'(영화를 보신 분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정황적 근거에 불과하니까 아직까지는 장혁을 진짜 살해범으로 인정할 만한 물증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뒷 얘기를 보고 있으면 완전히 맥이 풀린다. 영화에서 장혁을 범인으로 몰고가는 결정적 물증은 장혁이 아내에게 프로포즈를 할때 찍은 사진인데 그곳은 장혁이 아내가 죽기 몇 시간 전에 자동차 사고를 낸 곳이기도 하다. 이 자동차 사고는 영화내내 장혁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유일한 사건이었으나 영화 후반부 장혁의 프로포즈 사진과 연결되면서 그 신뢰도가 갑작스레 추락, 급기야 살인에 대한 물증으로까지 전락하고 만다. 전후 사정을 좀 더 따져보자.  

장혁은 아내가 살해되던 날 출장 근무 중이었다. 원래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 없었으나 공교롭게도 그 날은 두 사람의 결혼 기념일이었다. 평소 잦은 출장으로 불화를 겪던 장혁은 이 날만큼은 반드시 돌아가 아내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몇일 간의 밤샘 근무로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힘겹게 차에 올랐다. 하지만 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장혁은 졸다가 고속도로 진입점을 놓쳐 다른 길로 들어섰고 그 도로에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 사건은 아주 쉽다. 장혁이 그 도로에서 사고를 낸 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있다면 무죄. 왜냐하면 아내가 살해된 시점을 따져봤을 때 그 시각 교통사고를 당한 장혁이 아내를 죽일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프로포즈 사진의 비밀을 알아낸 뒤 부터 이 알리바이는 완전히 무너진다. 그 도로는 장혁이 처음 가본 길이 아니었다. 장혁은 길을 잘못 든게 아니었다. 장혁은 일부러 그 길에 들어섰다. 왜냐고? 살해한 아내의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서. 사건 당일로 돌아가 보자. 

장혁은 그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한 그는 아내를 살해한 뒤 사고가 났다고 주장한 국도로 길을 되짚어 온다. 그리고 교통 사고로 정신을 잃었다고 주장한 몇 시간 동안 아내의 시체를 유기했다. 장혁은 집 근처에 도착해 꽃과 케잌을 샀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해한 아내의 침대를 마주한다.  

고작 '한장의 사진'에서 도출된 이 대단한 추론은 장혁과 아내가 등장하는 플래시백으로 연출된다. 관객은 이 회상 장면에서 장혁이 이전에도 살인 경험이 있으며 심각한 싸이코패스라는 진실을 마주하고 그 사실을 눈치챈 아내를 태연히 살해하는 장혁의 모습을 본다. 영화는 이것이 바로 사건의 전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뢰인이 더 좋은 영화가 되기 위해선 여기에 함정을 만들어야 했다. 관객들은 장혁과 아내가 등장하는 플래시백=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회상 장면을 구성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사건의 전말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전지적 작가인가? 아니면 장혁을 범인으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인가? 만약에 후자라면 그 회상 장면은 철저히 오염된 거다. 하정우 자신도 장혁을 변호할 때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검사는 정확한 물증없이 정황적 근거 만으로 피고인을 살인범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그랬던 자신이 이제는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의뢰인을 공격하고 있다. 만약 영화가 장혁의 부인 살해 장면을 하정우, 박희순 등 이해 당사자의 추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었다면 이 영화는 좀 더 생각할 여지를 남겼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 앞에서 '네 개의 진실'을 말했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처럼 말이다.  

이 영화를 변호하기 위해 한 가지 기억을 되 짚어 보면, 회상씬 중 주목할 만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진입 금지 테이프가 어지럽게 붙어 있는 살해 장소. 바로 장혁의 집, 시각은 밤이었다. 그 때 갑자기 방에서 '살해당한 아내'가 나와 물인지 우유인지 모를 음료를 벌컥 벌컥 들이킨다. 논리적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단 한 컷. 이 컷이 왜 주목할 만한 장면일까?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이 한 컷이 지금껏 등장했던 회상씬을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보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을 잘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온다. 간단히 말해 이 컷은 영화에 나오는 모든 회상씬들이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그게 아니라면 회상씬들이 적어도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믿을만 하지는 못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거다. 돌이켜보면 장혁의 아내 살인 장면은 조명 톤이나 장소, 시각 등의 배경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그 씬과 정확히 일치한다. 

비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 의뢰인의 아쉬운 점은 바로 이 비약을 비약이 아니라고 방어할 만큼 충분한 읽을 거리를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 저것 두서 없이 얘기했지만 좋게 좋게 마무리 하면 의뢰인, 괜찮은 영화다. 법정 스릴러라고 하기엔 이야기가 어설프다느니 그 밀도가 헐겁다느니 비난의 말이 많고 그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8천원이 아깝지 않은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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