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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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미국을 향한 음모>는 대담한 가정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홀로코스트가 미국에서 벌어진다면?'


일본의 생체실험과 더불어 20세기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꼽을만한 홀로코스트. 역사는 그것이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독일에서, 나쁜 독일인들에 의해 벌어졌음을 실증한다. 놀라우리만치 사악한 히틀러와 소름 끼칠 정도로 정교한 나치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에 분노했다. 1960년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모사드가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평화로운 삶을 살던 나치 친위대 장교, '파이널 솔루션'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하여 이스라엘로 압송한다. 이스라엘은 그를 기소되어 1961년 공개 재판이 열렸는데 이를 참관한 한나 아렌트가 당시의 경험을 엮어 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한나 아렌트의 핵심은 잔인했다. 그녀에게 악행은 악마가 아니라 평범하고, 성실하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볼 땐 선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었다.


'악의 평범성'


약간의 조건만 갖춰진다면 누구나 홀로코스트의 열렬한 실행자가 될 수 있다. 남의 전쟁에 불과했던 싸움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나치를 무찌른 미국인들도? 나치의 가장 큰 적이자 홀로코스트에 누구보다 분노했던 그 선한 양키들이? <미국을 향한 음모>는 이 가정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이 소설은 정말로 '공상'이라 부를 만큼 완전한 거짓말로 문장을 쌓아나가지만 그 이야기는 무서울 정도로 현실감이 있다. 이것은 진짜 벌어진 일, 너무나 완벽해서 가짜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페이크 다큐다.


필립 로스는 이 소설이 출간되기 전 뉴욕 타임스의 요청으로 에세이를 기고한다. 그 글에서 필립 로스는 미국의 33대 대통령을 린드버그로 만든 역사적 사실의 변형 이외에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사실적으로, 논픽션을 쓰듯이 쓰고자 했다고 밝혔다. 또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기도 한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놀랍고, 아름답고, 충격적으로, 하지만 그럴법하게 행동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 대가는 자신이 말한 그대로, 한치의 어긋남 없이 문장을 직조하여 완벽한 거짓을 파렴치한 현실로 만들어낸다.


정말 대단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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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기 - 세상을 내 편으로 삼는 법
오후 지음 / 생각의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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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언의 책이다. 시원하고 호쾌하다.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보다는 인간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미지가 세상을 지배하는데 왜 이미지와 싸워야 하는가? 따라야 한다. 이용해야 한다. 성공을 하려면 이데아에 모신 절대윤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칠 게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게 '옳다'는 게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이다.


심장에 찔린 듯 날카로운 문장을 하나 소개한다.


사람들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p. 40)


환경운동가나 각종 공익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은 이 문장을 손바닥에 적어놓고 틈날 때마다 읽어야 한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니 정부가 차량 5부제를 시행한다고 하자. 아마 이 정부는 다음 선거에서 대패할 것이다. 사람들은 망가지는 지구에 대해선, 그게 사라지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존속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뿐이지만 자신이 감수해야 할 불편에는 치를 떤다.


실리콘 벨리에서 프리우스와 테슬라가 대인기를 끌었던 것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전기차를 몰면서 쿨하고, 진보적이고, 심지어 더 윤리적이라는 '이미지'를 얻어갔다. 전기차가 대의를 강조하는 상품이었다면 아마 오늘날의 테슬라는 없었을 것이다. 테슬라는 우리 내면의 욕망과 허영을 완벽하게 이해한 기업이다.


살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 많은 일은 운이며 그 운에는 겉보기가 쓸데없이 중요하다는 것이다.(p. 7)


쓸데없이 중요한 것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쓸데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게 진짜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때 카카오는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기업이었다. 문자 메시지의 시대, 한 건에 30원이나 하던 커뮤니케이션 비용은 카톡의 등장으로 거의 0원이 됐다. 사람들은 거기서 연락을 하고, 업무를 보고, 선물을 주고, 송금을 한다. 생활의 모든 편의가 단 한 개의 앱에서 제공됐다. 수익성 측면에선 최전성기를 누리는 지금도 네이버보다 작은 회사지만, 사람들은 카카오를 더 큰 기업으로 생각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세계에서 더 크다는 건, 더 좋다는 걸 의미한다.


카카오는 정보 부족과 인간의 몰이해 그리고 환상이 만든 신기루였다. IDC 화재로 실질적인 불편을 겪자 신기루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편의를 제공하던 시민의 친구 카카오는 어느새 국민의 선택을 억압하는 독재자가 되어버렸다.


이게 바로 세상이다. 보여주기는, 거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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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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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의 책날개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제임스 설터의 얼굴을 봤다. 잘 생긴 미국인이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방탕하고, 허무한 남자 주인공들의 얼굴과 은근히 겹쳐지면서, 또 묘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제임스 설터는 그 남자들보다는 좀 더 남성적이었다. 티모시 살라메가 아니라 브래드 피트에 가까웠다.


1925년 뉴욕에서 태어난 제임스 설터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비행 중대장까지 지냈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데뷔 장편 <사냥꾼들>을 내놓는다. 평은 시원찮았다. 나는 좋았다. 이후의 소설들은 완전히 달랐다.


제임스 설터를 제임스 설터로 만든 건 <사냥꾼들>이 아니었다. <고독한 얼굴>은 <사냥꾼들>에 더 가까운 소설이다. 원래 이 소설은 영화 시나리오로 집필됐다. 영화화되지 못하자 소설로 다시 썼다. 화면으로 봤다면 굉장히 지루했을 것이다. 강렬한 사건은 없다. 이 정도 이야기를 맡을만한 감독이 누가 있을지 생각해 본다. <디 아워스>의 스티븐 달드리. <디 아워스>는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원작 소설이 얼마나 지루한지를 알고 나면 스티븐 달드리가 신처럼 느껴질 것이다. <Running on Empty>의 시드니 루멧도 떠오른다. 고독을 주제로 결을 맞춘다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토마스 알프레드슨도 맡길만하다.


<고독한 얼굴>은 산악인의 이야기다. 별 직업도 없이 이 여자 저 여자를 떠돌아다니며 산을 오르는 남자. 배경은 몽블랑. 설산과 거대한 빙벽. 인간의 나약함을 가장 철저하게 알려주는 장소. 주인공 랜드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경로를 찾아 몸을 던진다. 때론 친구들과 함께, 주로는 혼자서. 친구들 중 둘이 떨어졌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크게 다쳤다. 랜드는 살아남았고, 홀로 남았다.


산을 오르는 이유가 뭘까? 산은, 오를 때만큼 내려올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했다는 자괴감을 떨쳐낼 수 있어야 한다. 중간에 내려왔다면,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것이 낫다. 하지만 기자들은 실패에도 플래시를 터뜨린다. 실패의 이유를 묻는다.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지만 해야 한다. 그들은 실패를 먹지만, 성공은 더 잘 먹기 때문이다.


소설은 몽블랑에서 불어오는 바람만큼 서늘하고 간결하다. 잡내가 없다. 해야 할 말만 하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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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 보급판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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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파인만은 칼텍의 1~2학년 학부생들에게 물리학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른바 '물리학의 정석'을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강좌의 수강생은 180명이었고 일주일에 두 번 진행했다. 대형 강의실에 모여 수업을 한 뒤 15~20명의 소그룹을 이뤄 조교의 지도하에 토론하는 시간도 있었다. 실습은 매주 한 번이었다. 강의의 목적은 당연히 신입생들에게 물리학의 재미를 알려줌으로써 그 관심이 꾸준히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정말 사랑해서, 열심히 배우기 위해 대학에 왔는데 내용은 너무 어렵고, 교수는 우리가 이미 다 아는 것처럼 강의를 하고, 실생활과는 아무런 연결도 없는 순수한 이론 덩어리들을 주입받으면서 느끼는 소외감. 파인만은 이 강의가 '목적 없이 끌려가는 수업'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파인만은 강의의 목적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어려운 개념이라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유머와 위트는 청량감을 더해 무게를 더는 핵심 소스였다. 언제나 신선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그의 태도는 학생들로 하여금 내용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까지 배우게 했다.


이 전설의 강의는 총 52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는 그중 수식이 적고 내용이 쉬운 것을 6개만 추려 담은 책이다. 내용이 '비교적' 쉬운 것이지 마냥 쉬운 건 절대 아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소파에 앉아 가볍게 읽는 건 불가능하다. 말만 물리 이야기지 그냥 물리다.


파인만 자신도 이 강의의 성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부생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결코 훌륭한 강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학생들이 제출한 시험답안지를 볼 때, 아무래도 이 강의는 실패작인 것 같다. (중략) 강의실에 들어왔던 동료 교수들의 말에 의하면, (중략)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은 학생이 10~20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p.33)


무려 '칼텍'의 수재 중에서도 5~10% 되는 최상위 학생들만 이해할 수 있었던 수업을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흡수할 수 있겠는가! 이 강의는 오히려 동료 교수들과 대학원생에게 더 큰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읽고 또 읽으면 언젠가 이 여섯 가지 물리 수업도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올 수 있을까? 그래도 문제에 접근하는 파인만의 방식은 충분히 곱씹을만하다.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해 법칙을 빌드업한 뒤 현상을 해석하는 능력. 이런 지능을 갖출 수 있다면 세상 무서울 게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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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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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좋은 소설을 많이 만난다. 그중에서도 이 책은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의 진리가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알려주는 따뜻한 소설이다.


가족이란 정말 지긋지긋한 존재다. 우리가 살면서 맺는 수많은 인간관계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임의적 관계다. 하지만 가족은 숙명이다. 아무리 자르고 갈고닦아도 핏줄은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핏줄은 남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내가 아무리 못해도 끊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내 아버지 고상욱 씨는 이십 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자본주의의 중심 서울로 향하지 않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심지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 터를 잡았다(p.8).


대한민국에서 빨간 물이 한 번 든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었다. 문제는 이 낙인이 그 가족들에게까지 흘러들어 갔다는 점이다. 서울대를 갈 만큼 공부를 잘했으나 돈이 없어 육사에 지원했던 조카는 아버지도 아닌 아버지 동생의 빨갱이 이력 때문에 입학이 좌절된다. 상욱 씨의 형은 그나마 명이 짧아 못 볼 꼴을 덜 보고 갔지만 그의 동생은 형보다 오래 살아 참아내야 할 것이 많았다. 어린 시절 상욱 씨의 동생은 터울이 많은 형을 늘 존경했었다. 형이 동네에서 제일 똑똑한, 마을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형 때문에 아버지가 '국군'에 총살을 당하자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고상욱 씨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온 가족을 시궁창에 처박은 주제에 뻔뻔하게도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고상욱 씨는 혁명가였기 때문에 농사에도 서툴렀다. 노동을 글로 배웠기 때문이다. 패배한 혁명가인 주제에 생활력도 없으니 그 가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은 보지 않아도 눈에 훤할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기고문으로 생식 능력을 잃은 아버지가 동네의 용한 한의사가 달여준 약을 먹고 늘그막에 기적적으로 얻은 딸이다. 나는 엄마보다도 아빠를 좋아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란 말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창 예민한 시기, 아버지는 빨갱이 조직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로 다시 한번 옥살이를 한다.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철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는 낯설었다. 둘 사이에는 6년의 시간보다 더 먼, 어쩌면 죽어서도 좁혀지지 않을 깊고 넓은 거리가 생겨버렸다.


빨치산의 조카도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는데 그 딸은 오죽했으랴. 딸에게 아버지는 지긋지긋한 혈육, 굳이 낳아서 고생을 시키는 '웬수'였다. 그런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전봇대에 머리를 들이박고 죽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 죽음이 열어주는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아, 왜 우리는 이미 늦은 뒤에야 뭔가를 깨닫는가. 깨달음은 왜 항상 가고 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는가. 진한 전라도 사투리가 전하는 담담한 진리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빨치산이니 사상이니, 해방이니 혁명이니 하는 얘기들, 이제는 촌스럽다 못해 아예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 어떠한 이야기의 재료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은 떡하니 '해방'이란 이름을 달고서도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진짜 진짜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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