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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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좋은 소설을 많이 만난다. 그중에서도 이 책은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의 진리가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알려주는 따뜻한 소설이다.


가족이란 정말 지긋지긋한 존재다. 우리가 살면서 맺는 수많은 인간관계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임의적 관계다. 하지만 가족은 숙명이다. 아무리 자르고 갈고닦아도 핏줄은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핏줄은 남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내가 아무리 못해도 끊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내 아버지 고상욱 씨는 이십 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자본주의의 중심 서울로 향하지 않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심지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 터를 잡았다(p.8).


대한민국에서 빨간 물이 한 번 든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었다. 문제는 이 낙인이 그 가족들에게까지 흘러들어 갔다는 점이다. 서울대를 갈 만큼 공부를 잘했으나 돈이 없어 육사에 지원했던 조카는 아버지도 아닌 아버지 동생의 빨갱이 이력 때문에 입학이 좌절된다. 상욱 씨의 형은 그나마 명이 짧아 못 볼 꼴을 덜 보고 갔지만 그의 동생은 형보다 오래 살아 참아내야 할 것이 많았다. 어린 시절 상욱 씨의 동생은 터울이 많은 형을 늘 존경했었다. 형이 동네에서 제일 똑똑한, 마을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형 때문에 아버지가 '국군'에 총살을 당하자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고상욱 씨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온 가족을 시궁창에 처박은 주제에 뻔뻔하게도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고상욱 씨는 혁명가였기 때문에 농사에도 서툴렀다. 노동을 글로 배웠기 때문이다. 패배한 혁명가인 주제에 생활력도 없으니 그 가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은 보지 않아도 눈에 훤할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기고문으로 생식 능력을 잃은 아버지가 동네의 용한 한의사가 달여준 약을 먹고 늘그막에 기적적으로 얻은 딸이다. 나는 엄마보다도 아빠를 좋아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란 말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창 예민한 시기, 아버지는 빨갱이 조직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로 다시 한번 옥살이를 한다.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철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는 낯설었다. 둘 사이에는 6년의 시간보다 더 먼, 어쩌면 죽어서도 좁혀지지 않을 깊고 넓은 거리가 생겨버렸다.


빨치산의 조카도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는데 그 딸은 오죽했으랴. 딸에게 아버지는 지긋지긋한 혈육, 굳이 낳아서 고생을 시키는 '웬수'였다. 그런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전봇대에 머리를 들이박고 죽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 죽음이 열어주는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아, 왜 우리는 이미 늦은 뒤에야 뭔가를 깨닫는가. 깨달음은 왜 항상 가고 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는가. 진한 전라도 사투리가 전하는 담담한 진리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빨치산이니 사상이니, 해방이니 혁명이니 하는 얘기들, 이제는 촌스럽다 못해 아예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 어떠한 이야기의 재료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은 떡하니 '해방'이란 이름을 달고서도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진짜 진짜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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