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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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가 호모 사피엔스만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류였다는 편견을 깨면서 시작했다면 <호모 데우스>는 인류의 진화가 우리의 시대에서 끝났다는 착각을 부수면서 시작한다. 생각해보라.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해왔던 호모 사피엔스가 왜 21세기에 와서 그 전진을 멈추겠는가? 우리는 기술의 진보는 쉽게 상상하면서도 인간 자체의 진화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진화가 수십 만 년에 걸쳐 일어나는 점진적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진화의 흔적을 경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화는 우주의 탄생 때 부터 단 일초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 하빌리스로 호모 하빌리스가 호모 사피엔스로 그리고 사피엔스가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진화한 것 처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호모 옵티머스 프라임이나 호모 사이버트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본주의 혁명과 기술의 발달로 현생 인류는 사피엔스 역사상 그 어떤 왕도, 사제도, 신도 해내지 못한 기아와 역병과 전쟁을 극복해 냈다. 시리아 내전과 IS의 테러, 아프리카의 수 많은 기아와 에볼라 창궐을 떠올리는 사람은 이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인류가 이 모든 악들과의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700년 전 페스트는 2,500만 명을 죽였고 천연두는 20세기에만해도 3억~5억 명의 인간을 죽였다. 하지만 2014년에 아프리카에서 창궐한 에볼라는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고작 8천여명을 죽이는데서 그치고 말았다. 전쟁은 어떤가? 이 야만적 행위는 이제 중동이나 아프리카처럼 여전히 고전적인 물질 기반의 경제를 유지하는 국가에서나 발생하는 드문 일이 되었다. 지식 산업이 경제의 근간이 되는 선진국들을 돌아보라. 오늘날 전쟁은 건질 게 별로 없는 사업이 됐다. 실리콘 밸리를 탱크로 점령한다고 그 기업들이 가진 기술과 노하우, 인력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기아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아프리카에서는 수 많은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지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기아보다 비만이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 인류가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무대는 어디일까? 기아와 역병과 전쟁을 정복한 인간이라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라리는 미래의 인류가 불멸을 찾아 떠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른바 호모 데우스. 인간은 신이 될 것이다.


과거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이는 의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의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육체가 가진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근육은 노화하고 심장은 결국 멈춘다. 의학은 끽해야 우리가 주어진 수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해줬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의 생명 공학은 초인간을 만들어내는 걸 최종 목표로 삼는다. 미래의 인간은 기계와 직접 결합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아예 디지털화 함으로써 유기체의 한계를 벗어날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이런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것은 인류가 공동의 목표와 비전을 위해 아주 효율적으로 협동할 줄 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협동에 관한한 사피엔스의 멱살을 틀어쥘 정도의 대가인 벌과 개미들은 왜 달을 향해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생명 공학을 탄생시키는대신 땅굴이나 꿀을 생산하는 걸로 만족했을까?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 즉 이야기를 믿는 인간의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상호주관적 실재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통해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화폐는 객관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나 수 억 명이 돈의 가치를 믿는 이상 우리는 그걸로 옷을 사고 여행을 가고 짜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다. 또 하나의 예시로 국가는, 돈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실체가 없음에도 국민에게 안정적인 소속감을 제공하고 나아가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충성을 다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상호주관적 실재는 다양한 욕구와 욕망, 의사를 가진 인간을 단일한 목표와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종교가 이 상호주관적 실재의 대장 역할을 했다면 현대는 인본주의 사상, 즉 인간은 고유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믿음이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는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하고 심해로 다이빙 한다는 얘기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당신은 왜 우주를 개척하려 합니까? 인간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 겁니까? 인간은 고유하고 신성한 존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됐습니까?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내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직장과 배우자와 꿈을 선택한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걱정된다고? 그렇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 누구도 당신의 선택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그것이 당신 스스로 결정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단지 인류라는 종을 번식시키기 위한 유전자의 명령이라면 어떨까? 당신은 당신의 꿈과 행동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얼핏 보면 이는 터무니 없는 생각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내가 아이폰과 갤럭시 중에서 아이폰을 구매하기로 결심한 게 정녕 내 유전자의 명령이란 말인가? 나는 아이폰의 깔끔한 디자인, H/W와 S/W가 완벽하게 결합된 결벽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깔끔한 디자인과 결벽성을 좋아하게 만든 원인은 뭐였을까? 아니 애초에 깔끔함과 결벽성을 선호하게 된 그 마음 자체를 내가 선택할 수 있었을까?


자유의지란 없고 욕망이 단순히 시냅스 끼리 주고 받는 전기 신호에 불과하며, 언젠가 우리가 그 메커니즘을 완벽히 규명하는 날이 오면 우리는 특정한 욕망, 취향, 꿈을 가진 인간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 정의하는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생물학은 더 이상 인간을 고유하고 신성한 어떤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삶에서 얻는 감각과 감정을 특정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생체적 알고리즘인 것이다.


알고리즘!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알고리즘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그것은 개선, 보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뛰어난 알고리즘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체제가 꼭 인간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GPU의 비약적 발전과 값싼 스토리지, 빅데이터 축적, 그리고 이것을 빠른 속도로 분석해 내는 AI와 머신러닝의 등장은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알맞게 행동하는 기계를 만들어낼 토대를 구축했다.


단순히 기계가 육체적 능력과 지능에서만 인간을 넘어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디지털 선생님은 학생들이 똑같은 질문을 수백 번 되풀이 해도 인내심이 고갈되지 않는다. 디지털 정신과 의사는 당신의 심박수와 호르몬 수치를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가장 효과적인 대꾸를 해줄 것이다. 인간이 자신감을 갖고 있는 창의력은 어떨까? 기원전 500년에 피타고라스가 말했듯이 음악은 정교한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 또한 성역이 아니다. 알파고가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과 정교한 가치망, 정책망 결정 능력으로 바둑을 제압했듯이 인공지능은 조만간 한 단어 뒤에 어떤 단어가 와야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세상이 오면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라리는 인간이 초지능과 영생을 갖춘 호모 데우스와 여전히 사피엔스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뉠 거라고 예언한다. 최신 생명 공학의 이기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부자들은 인공지능과 비슷한 또는 그를 능가하는 초인이 되어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존재가 될 것이고 이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개미나 벌, 또는 호모 데우스의 자비에 힘입어 동물원의 침팬지가 될 것이다.


근대에 공중 보건 시스템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산업 발전과 국토 수호를 위해 건강한 보통 사람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바로 이런 이유로 복지 제도와 의료 체계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미래는 더 이상 대규모의 보통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산에서 국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로봇이 활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보다 더 행복한 미래를 꿈꿔볼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제각각 고유한 프로그램이 되어(MS Word나 애플 Keynote처럼 우주라는 데스크탑 위에 줄줄이 늘어선 프로그램들!) 클라우드 스토리지나 USB에 담기는 것이다. 더이상 영토와 자원을 두고 인간끼리 싸우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USB에 담긴 나는 3D 프린터와 함께 우주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다가 원하는 행성을 만나면 그곳에 정착해 3D 프린터로 공작 기계를 만들고 그걸로 공장을 만들고 공장에서 더 정교한 로봇들을 만들어 나만의 문명을 창조해내는 것도 가능하다. 정말로 멋진 신세계가 아닌가!


<사피엔스>가 역사학과 생물학을 결합한 독특한 역사책이었다면 <호모 데우스>는 여기에 과학적 상상력을 더한 SF로 우리를 찾아왔다. 하라리는 현대를 지배하는 최첨단 기술들을 서로 연결해 시야가 좁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절대 그릴 수 없는 빅피쳐를 그려낸다. 그것은 광대하고 압도적이며 동시에 우울하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는 회의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반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는 결코 필연이 아니다.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아주 암울한 미래를 예언했지만 그것은 수 많은 미래의 후보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목적은 여러 가능성 중에 최악의 것들을 골라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그 선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21세기는 문명 진화의 특이점에 놓여 있다. 조만간 사피엔스의 세계는 변태와 탈피를 거듭할 것이다. 인간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세상은 급변할 것이다. 이 진화의 방향을 잡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모든 지혜를 모아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기 전에, 인간이 기술의 세계를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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