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유로부터의 도피 -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일련의 사회현상을 심층 분석 ㅣ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5
에리히 프롬 지음, 원창화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6월
평점 :
아주 먼 옛날 기사들이 용 사냥을 다니고 영주들이 초야권 따위 얼토당토 않는 권리를 주장하던 중세에는 인간의 머리 속에 '개인'이란 개념이 없었다. 워낙 개념이 없는 세상이다보니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리핀의 원시 부족 '아이타'를 보면 특정 개념없이 산다는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사는 이 부족은 '내일'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뭐? 어쨌냐고? 이들에겐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다는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중세에는 개인이 없었다. 따라서 어떤 직업을 구할지 무엇을 공부할지 어떻게 성공할지 어디로 이사갈지 누구와 경쟁할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흔히 중세를 암흑기로 부른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퍽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 비록 배는 곯겠지만 그저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삶을 살면 될뿐이다. 복잡한 의사결정을 할 일도 정신을 피폐하게할 경쟁도 없다. 걱정과 고민이 없는 전원 라이프!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대인들이 꿈꾸던 유토피아 아니던가!?
강제된 억압 속에서 노예로 살아가는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해라. 자유는 근대 사회의 최고 가치이며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해라. 하지만 우리가 이 자유의 세상에 오롯이 선 하나의 주체이며,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는건 삼가해주기 바란다. 싫다고? 그렇다면 묻겠다.
우리는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사회 시스템안에 종속되길 원하는가? 우리는 왜 남들이 바라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고 선망하는 회사에 취직하지 못해 불안해 하는가. 우리가 봉건시대의 노예가 아니라는 안도를 만끽하는 동안 사실은 교수의, 사장님의, 언론의 노예가 됐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겠는가?
사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불안과 동의어다. 사람들은 선택할게 너무 많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위대한 자유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하는 불안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아이러니다. 근대 역사는 사실상 대중이 특정 소수로부터 자유를 쟁취해 온 투쟁의 역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지킨 그 자유가 오히려 고독과 불안을 증대시키고 있다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운걸까? 자유가 독이 든 성배였을 수도 있고, 우리가 그저 돼지에 불과했던 걸지도 모른다.
다행인건 우리가 이 대답을 얻기 위해 인류 역사에 걸친 자유의 의미 발달 과정을 처음부터 연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뉴턴이 말했던가?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라고. 1941년, 유태계 독일인이었던 심리학자 한명이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기위한 명저 한 권을 내놓는다. 그의 이름은 에리히 프롬, 등장하는 저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무한한 자유가 부여한 압도적 무력감 앞에서 현대인이 취한 반응은 '자유의 반납'이었다. 불안을 선사하는 자유로부터 탈출해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준다고 선전하는 절대 권력에 복종하는 것. 이것이 말로 현대인이 최고로 여기는 '안정된 삶'의 실체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노예와 현대 노예의 섬뜩한 차이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복종이 과거의 노예에겐 강제된 억압인반면 현대의 노예(현대인)에겐 매우 자발적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당신의 친구가 목에 걸고 있는 진주 목걸이를 벗어 자신을 가둘 족쇄와 바꾸려 한다고 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아주 좋은 거래이므로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아니면 정신차리라고 따귀를 한대 때려줄 것인가?
1940년대의 독일은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주 목걸이를 족쇄와 바꾼 상태였다. 히틀러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아주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대다수의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선출됐다. 독일 국민은 군부 독재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나 북한의 주민과는 달리 아주 자율적이었으며 합리적이었다. 그들은 단지 가난한 독일, 무능력한 독일을 한 방에 개혁해줄 강력한 지배자를 원했을 뿐이다. 삶의 확실성만 부여해줄 수 있다면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 그것이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이 만개한 심리적 배경이었다.
내가 경탄하는건 이미 1941년 이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이 완벽히 분석됐다는 것이고 내가 슬픈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가 여전히 자유로부터 도피중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그 땐 단지 유럽인들이 약간 맛이 갔었던 것 뿐이라고, 이제는 히틀러 같은 사람은 안나올 거라고, 그리고 우리나라도 아닌 유럽의 현대사를 뭐 그리 진지하게 거론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난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1940년대의 독일인을 닮아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자유를 팔고 싶어하는지 알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군부 독재로부터 자유를 쟁취해온 투쟁의 역사다. 그것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파리 시민만큼,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싸운 미국의 흑인들만큼 치열하고, 또 숭고했다. 그들이 그랬듯 우리도 고귀한 자유를 얻었다. 부상은 급격한 경제 성장이었다.
초고도 성장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흥청망청 터뜨리는 사이 국가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고 급기야 곳간이 바닥을 드러냈다. 1997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그때 생긴 대량 실업은 10년이 지나서 비정규직과 취업난이라는 고용 불안으로 이어졌고 더딘 임금 임상과 치솟는 부동산 가격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일으켰다. 불안이 커지는 만큼 우리의 소망도 커져갔다. 이 답답한 현실을 한 방에 뒤집어줄 영웅을 기다리는 것.
독일인들은 히틀러는 선택했고 우리는 '잘 살아 보세'를 노래부르던 시절을 택했다. 우리가 지난 5년과 앞으로의 5년을 책임질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물은 권위주의적 통치와 무력을 앞세운 한 독재자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지난 5년), 직접적으로 계승한(앞으로 5년) 사람이었다.
기가찬것도 정도껏 해야 한숨이 나오는 법이다.
현대인에게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롬의 통찰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무지로 인해 발생한 것이며 그러므로 무지가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온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때때로 회의가 든다. 우리는 정말로 몰라서 이렇게 사는걸까?
깊은 회의와 무력감은 개인을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데, 결국 이 나의 회의와 무력감이 나의 자유를 나의 적에게 파는 날을 오게 만들 것인지, 과연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 인내의 보상은 있는지 없는지, 어쨌거나,
잘살아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