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5
황석영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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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책은 황석영 선생님의 단편집 '돼지꿈'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125번째 작품이에요. 살아있는 한국 작가로서 민음사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사람은 단 두명 뿐입니다. 바로 이문열과 황석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민음사의 배려였겠죠. 이문열이 대표적인 보수 소설가라면 황석영 선생님은 진짜 진보입니다. 문학에서 벌어지는 이념의 충돌! 


혁명은 실패했고 복지는 물건너갔으며 국민은 패배한 현실에서, 앞으로 길이길이 남아 문명을 떨칠 사람은 황석영이 아니라 이문열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문학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문열이 그 잘나빠진 삼국지 '평역'의 성공에 취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죽은 작가'라면 선생님은 끊임없이 신작을 발표하며 여전히, 자신의 문학을 살고 계신 '살아있는 작가'이니까요. 

소설가에게 이념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면 응당 자신의 문학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쓰지않으면 죽은 겁니다. 소설가라는건 그런 직업이에요. 






선생님의 소설은 흔히 리얼리즘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리얼리즘! 소설이 흐리멍텅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거나 비판하는 고발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69'에서 평화로운 일상에 냉혹한 현실이 숨어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걸 자각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나는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처럼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런 삶 또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다면, 그래서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부와 행복을 분배하는 구조라면, 우리 무력한 개인들은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처럼 살기는 커녕 아무리 애를쓰고 노력해도 그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60-70년대의 노동자들은 어땠을까요? 어둡고 꽉 막힌 공장에서 하루 18시간씩 미싱기를 돌리다 진폐증에 걸려 죽는 사람들, 안전의식이 전무한 노동 현장에서 날품을 팔다 온 몸이 박살나는 사람들, 헌법이 제정된지 몇 십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지주와 소작농의, 종과 머슴의 관계로 착취 당하는 농부들. 소설 '돼지꿈'에는 모두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의 무기력한 일상을 볼 것으로 예상했다면, 천만에요! 소설은 작렬하는 태양 밑에 옴짝달싹 못하고 늘러붙은 찌꺼기 같은 인생을 그리지 않습니다. 소설은 칼날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황무지위에 날카롭게 솟은 바위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독불장군같은 기개를 드러냅니다. 주인공들은 화를내고 싸움을하고 마음껏 욕을하죠. 살기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겁니다.

소설은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아주 생생하고 선명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들의 삶 속에 섞여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나를 발견하게되죠. 작품이 이토록 생생한 현실감을 갖는 이유는 이 모든 상황과 인물들이 선생님의 삶을 빚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을 오롯이 살았다는 건 이런 의미에요. 


혹자는 이 리얼함을 천박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요? 중요한건 욕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욕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세상에 살고있는 주제에 혼자만 깔끔한척 점잖빼고 살면 어디 세상이 자기 스스로 변해 준답니까?


시대가 구리구리하면 소설은 거친 황무지위로 내려와야 합니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요?


그것은 우리가 문학을 통해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인식의 한계로 인해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평생 묶여서 자란 개가 사슬을 풀어줘도 사슬의 길이 밖 세상을 밟아볼 엄두를 내지 않는것처럼 억압에 길들여진 민중은 어느새 그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수록된 소설 '종노'는 이같은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주인공 동이 노인은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아온 말 잘듣는 머슴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노예 근성을 참지 못하고 뛰쳐 나가버릴 정도였죠. 지주는 최근들어 소작농들을 더 값싼 일용직 노동자로 대체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노예처럼 일만했던 소작농들은 일자리를 지키기위해 큰 소리를 내기 보단 주인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묵묵히, 흉흉한 소문을 견뎌냈드랬죠. 사단이 난 그 날도 사람들은 지주 가문의 명절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날이었습니다. 그 날 밤 한 젊은이가 지주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합니다.  


"야, 이 도둑놈들아. 느이들이 무슨 양반이야.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구 이 망할 놈들아, 느이 맘대루 해 처먹고 쫓아낼라구 그래."(125p, 종노)


소작농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십니까?


"아니, 저 놈이 뉘집 새끼야."

"혼찌검이 나야 해."

(125p, 종노)


그러고는 여럿이 달려나가 그 젊은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동이 노인은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죠. 


"이놈아....."

"죽을 때까지 남의 종살이나 해 처먹어라!"

(126p, 종노)





가장 효과적인 통치 전략은 피지배계급을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를 좀 더 나은 노예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은 노예는 이제 일반 노예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노예들의 꿈은 더 이상 해방이 아니죠. 그들의 꿈은 좀 더 나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옳은 말을 하는 젊은이를 흠씬 두들겨 패면 지주에대한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서 대대적인 소작농 정리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자기만큼은 쫓겨나지 않고 계속해서 소작을 부쳐먹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동이 노인입니까? 아니면 소작농입니까? 우리는 소설을 보며 그들의 노예 근성을 경멸하고 혐오합니다. 그러다 문득 그 소작농들의 모습이, 사실 거울에 비춰진 우리였다는걸 깨닫게 되죠. 리얼리즘 문학이란 이런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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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03-1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좀더 나은 노예가 꿈인 사회라는 제목에 이 글을 읽기전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삶 자체가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야 살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옳은 말을 하는 젊은이들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발전하겠지만, 저 같은 기성세대에게는 그런게 당연한게 되버렸습니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 그게 직장에서 몸부쳐 사는이의 운명아닐까요? 사는 것이 어쩌면 고역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살아 갈수 있는 방법은 니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짜라투스트라처럼 거대한 운명이라는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고 싶은 그리고 땅에 두 다리를 꽉 딛고, 눈도 부릅뜨고, 현실을 고민하는 것만이 나 같은 소시민이 해야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입에 바른말만 하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한깨짱 2013-03-15 13:08   좋아요 0 | URL
관심 가져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삶이라는건 결국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을 평생에 걸쳐 배우는 것 같은데, 참 아이러니합니다. 삶에 내던져진 인간이 그 삶을 극복하기 위해 죽을때까지 노력한다는게요. 어쩌면 삶이라는거 자체가 우리 스스로 원한게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사는건 정말 어렵고 힘든일인 것 같습니다.

dowan 2013-10-2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진기행의 김승옥 씨도 생존해 계십니다^^...

한깨짱 2013-10-23 13:42   좋아요 0 | URL
오 말씀하신 김에 김승옥님 소설도 다시 탐독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