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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ㅣ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평점 :
개념의 폭력
개념이 없다라는 말이 욕이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과연 몇 사람이나 개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을까?
머리 속에 사과를 떠올려 보자. 아마도 이런걸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는 어떤가? 이것은 사과인가?
그렇다면 이건? 이것도 사과인가?
우리가 사과의 '존재'를 사과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과는 더 이상 실재하는 사과가 아니다. 개념은 빨갛고, 파랗고, 시고, 달고, 반들반들하고, 썩었고, 까끌까끌한 사과를 오로지 사과라는 한 단어로 박제해 버린다.
단순명쾌한 정리? 히틀러가 가스실을 지어 유대인을 학살했듯이 우리는 개념을 지어 존재의 다양성을 말살한다. 이것은,
폭력이다.
개념이 대중문화에 침투했을 때
천편일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 절대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똑같은 드라마를 보고 똑같은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똑같이 웃는다. 우리나라엔 수 많은 중산층 가정이 있겠지만 드라마에선 고급 가죽 쇼파를 가진 5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영화에 나오는 자폐환자는 모두 서번트 증후군이고 지체 장애를 가진 아버지는 모두 아이엠 샘이다. 아침 드라마는 불륜에 불륜에 불륜을 거듭하고 저녁 드라마는 숨겨놨던 재벌의 아들 딸로 흘러 넘친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개념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대량생산된 개념들은 자본의 힘을 뒤에 엎고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사람들은 천편일률에 치를 떨면서도 열심히 그것을 소비한다. 길들여지는 것이다. 문화 산업의 핵심 전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전략은 똥을 만든 뒤 그것을 맛있는 음식이라고 속여 파는게 아니다. 그들의 전략은,
우리를 똥개로 만드는 것이다.
개념이 인간관계에 침투했을 때
존재는 결코 '단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곳에서 얼마나 자주 '한 마디'로 정리하길 강요 받는가?
당신은 1년에 열 번쯤은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리고 두 번쯤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덤벙이지만 친구의 생일을 매년 잊지 않고 카드를 보내주는 섬세한 사람이다. 그러나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는 덤벙이일 뿐이다. '덤벙이'라는 개념은 당신의 다양성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다.
객체의 개념화는 인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수 과정이다.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개념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정리가 되고 뇌에서 그것을 지식으로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대인 관계에서 오는 우울증이 개념화된 나와 내가 알고있는 나 사이의 괴리로 인해 생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도대체 나 다운건 뭐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좀 더 농밀하고 다양하며 모순적인 존재다. 하지만 타인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고정되고 예측 가능한 기계다. 타인의 예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순간 나는 더이상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쟤 왜 저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가진 본연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타인, 또는 특정 집단이 정의내린 개념으로서 행동하는 때가 생긴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정신분열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예측 가능한대로 타인이 움직여줄 때, 우리는 그것을 안전한 관계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정반대다.
'쟤한테 저런 면도 있었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 때 타인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해의 핵심은 의외성을 최대한 많이 발견하는 것이다. 의외성이란 결국 개념을 뚫고 나오는 존재의 다양성이다. 그 다양성을 모두 수집하고 채워 넣을 때 타인은 진짜 존재가 된다.
개념의 폭력을 고발한다
데리다와 들뢰즈는 모두 개념의 폭력을 고발하고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철학을 통해 추구한 목표는 당연 '이성과 합리'로 대변되는 '근대 사회'의 파괴! 이들의 철학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땅에 이성과 합리가 뿌리 내리기 시작한건 18세기였고 내가 살고있는 지금은 21세기지만, 이성과 합리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여기저기 신음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세상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는데.
문득 든 생각인데, 용을 잡으러 떠나는 중세 기사의 모험담은 사실 진실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철학자(오해 마시길.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철학자가 될 수 있다)의 메타포가 아니었을까? 붉은 비늘에 불을 내뿜는 날카로운 발톱의 용은 인간 사회의 상징이었던 거지. 다른 생각을 가질 수록 더 철저하게 짓밟아버리는 무시무시한 세상. 그리고 우리 철학자들은 모두 기사. 기사가 용을 죽이고 나서 결혼하는 공주는 사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세상의 진실'이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