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세트 - 전11권 - 시공인문교양만화 시공인문교양만화 사기
요코야마 미츠테루 지음, 서현아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30대의 남자라면 누구나 62권짜리 '만화 삼국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전 중에 고전, 방대한 캐릭터, 사춘기 소년의 로망을 폭발시킬 힘과 힘의 대결. 이 모든걸 10권짜리 무시무시한 소설이 아닌 만화로 본다! 앞집 철수도 옆집 만수도 다 봤다. 심지어 철수 엄마도, 만수 엄마도, 이 만화를 볼 때만큼은 혼내지 않았다. 그 만화의 작가 요코야마 미츠테루. 이번엔 그가 '사기'를 그렸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얘길 좀 더 해보자. 로보트라면 유년기 남자아이에게 딱지나 막대 자석보다 소중한, 그야말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데, 과거 거대한 강철 로보트를 직접 조종하며 세계를 지키는 놀라운 소년의 이야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철인 28호!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이 철인 28호의 원작가다(더 놀라운건 그가 '요술공주 샐리'의 작가라는 것!). 로봇물을 통해 불세출의 작가가 된 그였지만 어쩐지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역사'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전략 삼국지'를 비롯,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전국 명장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 소개할 사기까지 동아시아의 굵직굵직한 전쟁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만화로서의 생을 얻었다. 역사처럼 진지한 주제를 만화가 따위가 다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부디 그 경거망동한 생각을 거두시길. 삼십년 뒤에 퀴퀴한 먼지를 마시며 과거를 탐구할 사람은, 바로 오늘 시시한 만화를 보며 똘망똘망 눈을 빛낼 한 소년일 테니까.



단순한 선과 과잉된 검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트레이드 마크!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사기'는 철저한 고증을 보탰다거나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제시하는 만화는 아니다. 그야말로 만화! 흥미진진한 사실의 덩어리들을 만화답게 시원시원하고 굵직굵직하게 뽑아낸다. '속닥속닥'하는 의성어가 나온 직후 '아니 그자가 음모를!?'하고 놀라는 등장인물의 클로즈업이 되면 사건은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급작스런 전개와 감정의 변화에 때때로 '응?'하는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단순하고 명쾌한 진행이야말로 만화의 매력 아니겠는가. 쇼파에 앉아 한 시간 남짓을 읽고 나면 제국의 역사는 수십년이 흘러가 버린다. 페이지를 넘길 때 마차 흘러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사건은 투자한 시간의 대가로 충분할 것이다.


사기를 읽으며 신나는 또 한가지는 익숙히 알고 있던 단어와 고사성어들의 기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 외국의 소설이나 인문서를 보다 보면 단어의 기원을 찾아(주로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곤 한다) 서로 다른 단어들끼리의 긴밀한 관계가 밝혀지곤 하지 않는가. 사기를 읽고 있으면 우리 말에도 이런 흥미진진한 기원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토사구팽, 관포지교 같은 사자성어는 말할 것도 없고 와해, 궤변 같은 일상 단어가 언제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머리 속에 번뜩하는 느낌표가 새겨지며 절로 무릎을 치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말의 기원을 알게 되면 언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심오해지는 법이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그리고 그 아이가 좋은 글을 쓰길 원하는 부모라면, 역사책을 꾸준히 읽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권에 1,000페이지는 족히 넘어가는 '사기'의 성인 버전을 읽을리는 만무하니 이 만화는 분명 좋은 대체제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 보인 빈약함이다. 한나라와 초나라, 장기의 테마가 되기까지 한 이 두나라의 충돌은 '초한지'라는 소설로 각색되어 길이길이 남을 만큼 스펙타클하고 긴장감있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는 한신, 소하, 번쾌, 유방, 항우, 장량, 범증 등 역사에 내놓라 할만한 영웅들을 한꺼번에 쏟아냈으며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역사'였던 난세였다. 항우와 유방은 세기의 라이벌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수진'은 엉겁결에 넘어가 버리고 '사면초가'는 들릴둥 말둥 사라져 버린다. 두 영웅의 대결만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필시 자기의 서재에 '초한지'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읽어야 되는데 읽어야 되는데' 마음만 먹었으나 그 압도적인 분량에 엄두를 못냈던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다. 빽빽한 통근 버스 에서도, 흔들리는 전철 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게 만화! 요코야마 미츠테루와 먼지 날리는 전장으로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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