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기적처럼 느껴진다. 폭력이 영토와 권력과 집과 노예와 먹을 것과 온갖 아름답고 진귀한 것을 보장해 주던 그 시절에, 왜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사이좋게 나눠 갖길 원했던 걸까? 그들이 너무 순진했던 걸까? 아니면 만민의 평등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 이었던 걸까?


아테네는 1년 내내, 열흘에 한 번씩 민회가 열렸다. 아고라에 모여 정치와 국방과 경제를 논하던 시민들은 주홍 물감에 적신 밧줄을 흔들며 민회 참석을 독려하는 서기들의 고함 소리를 따라 원형 극장 '프닉스'에 모였다. 6,000명의 시민들은 그곳에서 500명의 평의원과 대면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누가 뽑히든 현실 세계에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좌절하게 만드는, 그래 그렇게 우리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시시한 대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1년에 한 번은 500인 평의회에 들어가 봉사해야 했다. 500인 평의회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었던 것이다. 프닉스에는 이 500인 평의회와 시민들이 모여 침략과 평화, 공공 사업과 과세에 대한 결정을 모두 '합의'하에 도출해 냈다. 단군 할아버지가 웅녀와 결혼해 고조선을 세우던 그 시절에 말이다.





나는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기적처럼 느껴지는 것 만큼 이후 이 천년 가깝게 인류의 역사를 지배한 억압적인 통치 체계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아테네 이후 민주주의를 실천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대놓고 그리스 문화의 카피캣을 자처했던 로마의 공화정이(왕이 없는 정치 체제라는 뜻) 있긴 했다. 하지만 집정관들은 결국 황제를 자처했고 막강한 권력을 차지한 이들의 폭력은 자유와 토론을 중시하고 국가적 의사 결정에 기꺼이 참여할 힘을 지니고 있던 시민을 소수 특권층의 삶을 위해 착취 당하는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아테네에서 평화를 부르짖고 전쟁에 반대하던 자유 시민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인간이 드디어 거추장스러웠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잔인성을 되찾은 걸까?


이 후의 역사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다. 물론 이 기간에 민주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가진 지역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16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그라우뷘덴'은 주변 정세를 두고 봤을 때 아주 이례적인 직접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곳의 민주주의는 권력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통치 체제였다. 그 누구도 권력을 차지할 자격이 없으며 이로인해 그 누구도 타인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면, 시민은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실행에 직접 참여해야만 한다. 민주주의가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아테네와 그라우뷘덴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계급적 평등(=권력의 부재)이야 말로 민주주의 탄생의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실천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를 확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오랜 공백은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한꺼번에 채워진다. 분노한 파리 시민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으며 파리 시장 드 소비니와 그의 장인 풀롱을(가난한 자들이 배가 고프면 건초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한 인물) 참수했고 급기야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를 단두대 위로 끌고 간다. 왕의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 막강했던 프랑스의 전제 왕정은 막을 내리고 드디어 프랑스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 사건은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입헌군주국 또는 공화정으로 이양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민주주의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같았을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혁명이 일어난 많은 나라가 국민의 투표를 허용하긴 했으나 선거권을 부여하는 기준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그 기준은 대개 보유한 재산이었는데, 이는 근대 민주주의가 만민의 복지와 평등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합법적 지배 체제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많은 이들의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는 점차 올바른 길을 찾아갔으며 오래지않아 모든 성인 남성들이 선거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성, 소수 민족, 노예들에 대한 선거권은 여전히 요원했으며 특히 여성 선거권의 경우 18세기, 19세기도 아닌 무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거의 모든 국가에서 그 권리가 인정된다. 그러고 보면 만인의 의한 만인의 민주주의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갓난 아기라고 할 수 있겠다.





보통 선거권의 확립으로 국민은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은 민주국가가 가진 영원한 숙제였다. 이에 레닌은 선거를 '억압받는 계급이 몇 년에 한 번씩 의회에서 인민을 '대표하고 억압'할 유산계급 대표를 결정할 권리를 누리는' 착취 행위(p. 324)라고 규정하기 까지 했다. 오늘날 세상을 웬만큼 아는 사람치고 이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을 엿 먹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선거다. 저 사람이 우리를 위해 일할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뽑으면 되고, 그 사람이 아니라는게 판명되는 돌아오는 선거를 통해 그를 몰아내면 된다. 민주주의는 이처럼 간편하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은 이 같은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막강한 돈과 언론의 힘을 엎은 정치인들은 대다수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재선에 성공한다. 투표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습관화된 무력감은 결국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을 양산하고 급락한 선거율이 기존 세력의 재선에 도움을 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황당한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30년 전만해도 바람직한 민주사회의 시민은 사회주의자를 때려 잡고 정부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었다.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오늘날 민주주의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는 오래된 것처럼 보이나 갓 솟아난 새싹처럼 싱싱하고 고정된 것처럼 보이나 시대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비록 우리가 의도한 바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실에 심각히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시기에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p. 22) 라고 말했다. 기원전 500년 고대 아테네에서 발흥한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침체 일로를 걸어왔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민주주의는 확실히 진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대체로 점진적이지만 때때로 급발진을 시도하기도 하며 그 부작용으로 인해 잠시 주춤하기는 하지만 또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2012년의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지금 우리가 빠져 있는 비탄은 명백히 민주주의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악하고 멍청한 지도자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정치 체제라면,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좀비가 된 국민들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자를 구원자라 착각하고 표를 던지는 정치 체제라면, 그딴건 차라리 없어져 버리는게 나은거 아닐까? 이런 생각에 잠겨 우울해 질때마다 이 두꺼운 책은 나에게 이런 말을 던지는 것 같았다. 상처 받지 말라,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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