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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소네 케이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단숨에 읽어 치웠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 없는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주 원초적인,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
사실 실존이니 진실이니, 주체니 자아니하는 온갖 위대한 사상으로는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없다. 그런것들은 인생을 헝클어뜨리기 위해 발명된 것이다. 당신의 삶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지금까지 믿어왔던 게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해? 사상은 의문과 고민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사악한 용이다. 이 용은 우리가 현실에 안주해 휴식과 평안을 얻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 용의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가 의지하던 세상은 흐물흐물 무너지다가 마침내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절대적 암흑으로 변해버린다.
하지만 이야기는 정반대다. 이야기는 휴식을 준다. 어린 시절 우리는 아련히 들려오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 우리와 똑 닮은 사람과 사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견고한 증거가 된다.
소네 케이스케의 단편집 '코'에는 일본 현대 소설이라면 예의 등장하는 엽기가 존재한다. 트라우마, 정신병, 암매장, 장기 매매, 사지 절단 기타 등등.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비정상적인 이야기를 매일매일 현실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기사는 이제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누가 누구를 죽인 다음 시체를 토막내 조금씩 조금씩 내다 버렸다는 얘기 조차 더 이상 뉴스가 될 수 없는 시대인 것을.
그렇다면 이 소설은 진부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끔찍한 현실에 익숙해져 있다지만 오히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해져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안개처럼 뿌옇게 우리 주변을 떠다닌다. 우리는 장기 매매와 암매장, 토막 살인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을 느껴본 적은 없다. 이 소설의 대단함은 이렇게 막연하게 떠다니는 고통의 관념을 아주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낸다는데 있다. 소네 케이스케는 이 칼날을 움켜쥐고 우리의 피부를 잘근잘근 썰어준다. 그것도 우리가 똑똑히 지켜보는 앞에서.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단편은('폭락', '수난', '코') '수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작이라 부를만하다. 특히 '폭락'의 경우 소재가 너무나 기발하다. '폭락'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주식 시장에 상장하는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그곳의 인간들은 자기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인간 관계를 관리하고 억지로 선행을 일삼는다.
그러나 이것을 과연 가상의 세계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를 돌아보라! 오늘날 인간 관계 맺기는 더 이상 온정과 인간애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며 언제나 관리되야 하는 대상이다. 결혼은 두 인간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한 숭고한 도전이 아니라 돈과 돈이 만나는 거대한 비지니스다. 나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면 부모형제와의 관계도 청산해야 한다. 그건 몰인정한게 아니라 최선의 의사결정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진장 애를 쓴다. 시장이라는 절대적 '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찍이 법으로 통치하는 것에 실패한 이 사회를 온전하게 다시 세운 것은 시장이었다.'(63p)라는 대사는 이 소설의 백미다.
'수난'은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다. 일본인이라면 충분히 써낼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코'는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가장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다. '폭락'이 소재의 참신함으로 활화산처럼 질주하다 뻔한 반전으로 추락하는 허술함을 보였다면(이런걸 보면 역시 신인은 신인이야라는 생각이 든다) '코'의 경우 구성이 매우 치밀하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마치 평행선처럼 진행되던 두 이야기가 결정적인 순간 마주치며 등골이 오싹한 전율을 끼얹는게 이 소설의 특징이다.
두 이야기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표현 자체도 꼼꼼히 신경썼다. 한 명의 등장인물은 평범하게 또 한 명은 독백으로. 특히 독백의 경우 등장인물의 정신병적 심리를 아주 잘 묘사하는데 이것이 또 다른 등장인물과 극명한 차이를 보여 소설 전체에 기괴한 분위기를 드리운다. 줄거리와 구성이 중요한 작품이기에 이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소네 케이스케를 단순한 호러 소설가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소설가는 우리 사회의 악마적 얼굴을 '호러'라는 장르로 버무려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같은 자질은(주제와 표현의 완벽한 결합) 그야말로 대작가에게서나 볼수있는 능력 아닌가! 물론 소네 케이스케는 아직 신인이다. 그의 자질은 일부에서 번뜩이며 나타났다 곧바로 사라지곤한다.
이 신세대 작가를 '부조리'란 옛 단어로 수식하고 싶지는 않지만, 문득 그 단어가 떠오른 이유는 내가 아마도 소네 케이스케에게서 '아베 코보'의 아메리카노 버전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