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대체로 똑똑하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스터디를 구성해 취업을 포함, 각종 시험에 대비하며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회를 찾아 듣고 자기계발을 위해 TV와 인터넷을 끈다. 이 다음에 꼭 성공할 것 같은 대학생들을 보라. 그들은 쓸데 없는 일에 질색한다. 그들은 효율과 합리의 화신이다.

효율과 합리의 기본 규칙은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선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한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선 시험을 잘봐야 한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선 시험에 나올 법한 것들만 공부해야 한다. 고액의 쪽집게 과외!

하지만 이렇게 공부한 학생들은 고작 A라는 질문에 A'를 내놓을 뿐이다. 해답이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것은 획일화 되어있고 따분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결코 B나 C라는
답안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나마 예상했던 A가 나왔기에 망정이지 D나 Z같은 문제가 나오면 그들은 아예 대답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위 공무원이나 판검사라고 하면 웬지 모르게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정답을 내는데는 도통해 있다. 그들은 선례와 규칙을 따르는 것만큼은 귀신같이 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범주에 들지 않은 사건을 마주했을 때는 커다란 당혹감을 느낀다. 그들은 게임의 규칙에 지배당할 뿐, 결코 게임 자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대학은 어떠한가? 국가와 기업에 인재를 공급하는 최대 납품처인 대학이 실무 교육의 광풍에 휘말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회는 해당 전공을 몇 년씩 공부한 학생들이 정작 실무에는 젬병인 사실에 볼멘 소리를 해댔고, 기업 총수의 주머니 돈으로 연명하는 정치인과 교육자들은 하나같이 대학 교육의 허와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인 교육이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사원을 겨우 쓸만한 부품으로 키워내는데 1인당 몇 억씩이나 든다며 한탄한다. 언론은 이렇게 재교육에 낭비하다간 국가 기간 사업의 경쟁력이 약화될까 두렵다며 설레발을 친다. 그들이 대학에 원하는건 이런거다.

'공학인증을 받고 복수전공을 하지 않은 컴공과 졸업생 20개 추가요.' 

그래서 오늘날 잘나가는 대학이 갖춰야할 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줄줄이 뽑아내는 대량 공급처로서의 역량과 시스템이다. 공학도도 문학을 알아야 하고 경제, 경영학과 학생들이 철학과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구한말 대한민국을 말아먹었다고 비난받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된다. 

바야흐로 대학에는 교양 교육이 사라진다. 심지어 입시 교육에서 조차 기초 과학의 과목수가 줄어들고 역사와 문화가 사라진다. 세계 최고의 인재가 입학한다는 동경대조차 생물을 배우지 않은 의대생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모르는 인문대생이 있을 정도니 이 세계가 전반적인 교양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양은 단순히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르네 데카르트가 몇 년도에 태어났고 리처드 파인만이 무슨 법칙을 발견했는지 줄줄 외우는 것이 교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KBS 퀴즈 대한민국'에 출연해 오천만원의 상금을 놓고 다투는 것 외에 그다지 할 일이 없다.

교양은 보다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지식이다. 학문의 계보를 흔히 나무에 비유하는데, 그 뿌리에 해당하는게 바로 교양이다. 그래서 교양을 모르면 원리를 모르고 원리를 모르면

A의 답이 A'고 B의 답이 B'라는걸 일일이 알려줘야 한다. 원리를 모르고서는 A와 B를 통해 C를 추론해 내고 A와 C를 합해 D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못한다. 

교양의 부재가 단순히 창의력의 부재만으로 끝나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교양의 부재는 반드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오늘날 자신이 하는 일에만 고도로 집중한 나머지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보라! 
그들은 3.5파운드의 잘나빠진 뇌를 이용하여 비효율적인 관료제와 무한경쟁과 타인에대한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배금주의, 그리고 모럴해저드를 만들어냈다! 

 

 

 

이 세상에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 세계의 지배자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통 남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뚫어져라 각자의 나무만 쳐다본다. 숲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새 소통이 사라지고 시끄러운 소음만이 남으면, 하늘에서 불폭탄이 떨어져 문제가 되는 숲 전체를 날려 버린다. 

21세기에 분쟁이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해결된다.
오늘날 세계 최고라고 손꼽히는 많은 대학에서는 이런 바보들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이런 바보들이 지구를 지배한다.


P.S - 나는 최첨단 전자기기를 만드는 굴지의 회사에서 니체와 실존주의와 커트 보네거트와 찰스 디킨스에 대해 논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저 떨리는 마음으로, 매우 감명 깊게 읽은 소설 한 권을 추천하는 CEO를 단 한 명이라도 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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