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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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가 돌아왔다. 당당한 발걸음은 아니었다. 다소 수줍은 듯도 보였다. 따라온 이들은 그의 이름을 깔끔하게 닦아 눈이 부시는 은쟁반에 담아왔다. 혹시 모를 걱정이었을 것이다. 10년이 지났으니까. 스물한 살에 그를 읽은 사람은 서른 하나가 되었고, 서른 하나에 만난 사람은 마흔한 살이 되었다. 스물 하나와 서른 하나, 서른 하나와 마른 하나는 다르다. 10년은, 한 인간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새로 세워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마음의 변화에 비하면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겉모습의 변화는 오히려 느린 편에 속한다. 변한 몸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어도 변한 마음은 다르게 읽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은 같은 힘으로 밀어도 상대의 마음이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하물며 더 약한 힘이라면? 대안은 힘의 모양을 바꾸는 것이다. 탕자는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코디언>은 그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었을까? <고래>는 그랬다. 물론 <고래>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소설이라는 건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소설을 살아생전에 다시 읽을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아코디언>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이야기는 나태하다. 성의가 없다. 소설을 읽고 난 뒤 그들이 가져온 은쟁반을 다시 쳐다보면 쓸쓸하게 숨이 죽은 이름만 보인다.


천명관.


1950년대, 전후 앵벌이들의 삶에서 그가 어떤 이야기를 본 건지 헤아려본다. 모르겠다. 소설은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고 표면을 겉돈다. 유일한 장점은 겉돌기 때문에 술술 읽힌다는 것이다. 천명관의 이름을 마음이 새긴 사람 중에 <아코디언>을 기대한 사람은 단언컨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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