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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
오강남 지음 / 김영사 / 2026년 4월
평점 :
오강남 교수의 책을 처음 읽은 건 20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골수 감리교인으로 매우 열심히 교회를 나가는 건 당연하고 청년부 활동까지 수행하던 신앙인이었다. 그렇게 신실한 사람이 비교종교학자의 책을, 그것도 <예수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의 교양 수업이었다.
'세계 종교와 철학'. 이 과목에서 우리 조는 '악마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맡았다. 때마침 개인 미디어 붐이 일어 촬영 장비가 꽤 흔했던 탓에 나는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의 민낯을 샅샅이 밝힐 포부를 가득 담고. 그 성전의 결과를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개신교의 종교 교육에 완전히 실망했다. 아니, 수치심이 들었다. 그때의 경험은 야훼가 알라와 같은 신인줄도 모르고 신실하다 믿었던 내 신앙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로 종교란 무엇인가에 깊이 빠져들었다. 종교의 종류를 수집하는 단순한 정보 섭렵에서부터 교리의 논리적 탐구, 철학적 검증, 역사 되짚기까지, 믿음이 충만한 이들이 흔히 무시하듯 마음이 아닌 머리로 보았고 그 때문에 다행히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는 않았다. 나는 신을 믿을 수는 있어도 종교를 믿을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종교를 질병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혼자서는 신과 대화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의존형 인간이 스스로 구속과 착취를 선택하는 게 종교를 갖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강남 교수는 "종교란 본질적으로 '궁극 실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과 변화의 체험'"(p. 105)이라고 말한다. 종교인에게 궁극 실재란 대부분 자기의 신이다. 자기 신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이란 내가 딛고 선 이 세상이 결코 실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그 자체가 변화이면서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어렵다면 중간을 몽땅 떼어낸 뒤 이렇게 읽어도 좋다. 종교란 궁극 실재를 통한 변화의 체험이다.
문제는 궁극 실재다. 기독교인에게 이는 하나님이고 이슬람교도에게는 알라, 불교도에게는 부처, 힌두교도에게는 브라만, 비슈누, 시바, JMS 교도에게는 정명석, 신천지 교도에게는 이만희다. 열거한 사례를 보면 명쾌하게만 보였던 종교의 정의가 쓰레기 가득한 똥통에 빠져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걸 느낄 것이다.
모든 종교는 변화의 체험보다는 궁극 실재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변화의 체험은 '실재를 통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 변화를 체험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야훼는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야훼는 질투가 많은 신이고 다른 신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훼를 통한 변화의 체험은 모스크를 볼 때 분노에 치를 떠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강남 교수는 종교가 궁극 실재를 정의하는 말이나 글이 아닌 궁극 실재 그 자체를 보고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일을 아주 훌륭하게 해낸 사람을 여럿 안다. 정명석과 이만희, 문선명, 아사하라 쇼코, L. 로널드 하버드, 제임스 워런 존스, 죠셉 스미스. 이들은 기존의 종교가 정의하는 궁극 실재를 훌쩍 뛰어넘어 자신만의 실재를 만들어냈다.
궁극 실재를 객관적으로 정의하려 들면 우리는 끝나지 않는 피의 성전을 보게 되고 그것을 주관적 체험의 영역에 놔두면 사이비 종교의 늪에 빠지게 된다. 앞뒤를 포위한 적을 뚫는 정의는 한 가지뿐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