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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먹는 존재들 - 온몸으로 경험하고 세상에 파고드는 식물지능의 경이로운 세계
조이 슐랭거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10월
평점 :
내 책상 위에는 30개의 고수 새싹이 있고 이들은 늘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깜빡하고 커튼을 닫아놓은 날에도 새싹은 빛이 놓였던 흔적을 따라간다. 고수는 하늘에서 날아온 빛 알갱이와 땅 밑에서 끌어올린 물방울을 합해 자신의 몸을 구성한다. 재료는 모든 식물에게 동일한데도, 고수는 자기만의 향을 뿜어낸다. 잎을 비빈 손을 코 밑에 가져가면 그 신선한 향기가 숨 속에 가득하다.
더 나아갈 것도 없이 이것은 기적이다. 누군가는 호흡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먹는다고 말할 이 행위가 탄소를 산소로 바꾸고 하나의 세포였던 존재를 복잡하고 깊은 생명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빛과 물로 만들어졌다. 인생의 대부분은 잊고 살지만, 사실은 그렇다.
식물을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이 존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식물은 우리를 비웃을지 모른다.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거대하고 흉악한 지를. 예전에는 이런 걸 비유라고 불렀겠지만 차츰 발견되는 식물지능의 세계는 이게 그저 비유가 아닐 수도 있음을 얘기한다.
식물지능? 식물이 움직인다는 데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 움직임에 우리는 능동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중력에 잡힌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은 뿌리에 묶여 있다. 식물은 가문 땅이 싫다고 뿌리째 걸어 나와 윤택한 흙을 향해 모험을 떠날 수는 없다. 맹모삼천지교는 가능하지만 식모삼천지교는 불가하다. 이동을 걷기로 제한한다면 이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식물은 주어진 한계 안에서 생존을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예컨대 마른 흙에 내린 뿌리는 가늘고 길어진다. 저 깊은 곳에 존재하는 물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기 때문이다. 식물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 자신의 뿌리를 변형시킨다. 맹모가 이사를 가듯이.
식물이 물이나 빛을 찾아내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뇌도 없고 소리도 못 내는 그 바보들은 자기가 필요한 존재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걸까? 이것을 단순한 반응이라고 말하면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다. 그렇다면 식물에게도 신경계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우리의 손을 다 태울 때까지 불을 쥐고 있지 않는 이유는 뜨거운 감각이 전기 신호가 되어 뇌로 전달되고 당장 손을 떼라는 명령이 다시 전기 신호로 변해 팔 근육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전기 신호는 호르몬의 작용이다. 내 고수 새싹이 매일 아침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게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광자가 잎을 때리면 호르몬이 발생하고 그 호르몬이 만든 전기가 줄기를 타고 흘러 뿌리에 숨어있는 뇌에게 전달되는 걸까? 나아가 그 행위를 유발하게 만드는 감각은 무엇으로 수용하는 걸까? 잎은 빛을 볼 수 있는가? 광자가 자기 몸을 때리는 충격을 느낄까? 뿌리는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걸까? 파고들수록 식물지능에는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불교도에게 금서가 될 여지가 충분하다. 위대한 고타마 싯다르타도 윤회의 굴레에 식물의 운명을 포함하지는 않았다. 불교도는 어떤 죄를 지어도 식물로 다시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식물을 마음 놓고 먹는다. 칼로 자르고, 돌로 두드리고, 불로 지지면서. 동물윤리학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시대에 식물윤리학을 논하는 건 너무 나간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식물에게도 감각이 있다. 그들에게도 지능이 있다. 그들은 누가 자기 잎을 뜯고, 자기 줄기를 꺾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들은 대화하고, 고통을 받고, 비명을 지른다. 아직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