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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드
힐러리 맨틀 지음, 이경아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평점 :
황무지로 둘러싸인 페더호튼은 과거에 박제된 야생의 마을이다. 주민들은 몽매하고 미신에 빠져있다. 그곳에 가톨릭 교회가 존재한다는 건 기적이었다. 교구 신부는 무신론자였다. 수녀원장은 폭군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페더호튼에 들이닥친 주교는 이 어리석은 마을을 개조하기 위해 변화를 요구한다.
"현지어 미사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나? 생각해 본 적은 있고? 나는 그런 미사에 대해 생각 중이네." (p.20)
교구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사람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뜻입니까?"
"바로 그걸세."
"라틴어 미사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 사람들이 영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고생 중입니다." (p.21)
이상의 대화는 결코 과거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교구 사제의 보수성과 페더호튼 주민들의 무지, 그리고 현지 사정도 모르고 무리한 행정을 펼치는 주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구 신부가 반항하는 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이 어리석은 돼지야."(p.39)
정말 막장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주교가 파견한 젊은 신부 플러드(Fluud)가 나타난다. 그의 등장 이후 페더호튼에서는 주교의 바람대로 '변화'가 나타난다. 새까만 신부복에 깃든 이 신부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를 신비한 행동을 거듭한다. 잠들어 있던 페더호튼이 깨어나고 그 기지개와 함께 우연인지 기적인지 모를 사건들이 한데 뒤엉켜 쏟아진다. 마치 홍수(Flood)처럼.
나는 예전부터 종교를 만든 건 악마라고 생각해 왔다. 종교는 인간이 신과 직접 소통하는 것을 이단으로 간주한다. 종교는 교리 없이는 신앙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기독교가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을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로 간주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이교도가 아니라 늘 팬데믹이었다.
사제복은 왜 검을까? 나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그 칠흑의 빛을 볼 때마다 악마가 떠올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죄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자비로운 신은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하여 주지만, 사제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다시 죄인이 된다.
전통적 관점에서 플러드는 악마처럼 보인다. 아무도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설교인지 유혹인지 모를 묘한 말들. 나는 플러드가 악마 코스프레를 하는 천사 측의 스파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라는, 악마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을 유혹해서, 울타리를 넘어, 다시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