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로하고
루만 알람 지음, 김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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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두개 다 보고 읽을거라면, 넷플릭스의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온 가족이 뉴욕을 떠나 여름휴가를 간다. 근교, 시골이다. 아빠와 엄마 아들과 딸. 완벽한 구성. 완벽한 날씨.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집까지. 누가 이런 집에 사는 걸까? 어떻게 하면 이런 집을 가질 수 있을까? 집 뒤엔 숲이 펼쳐지고 근처엔 해변까지 있다. 나무와 바다. 부족하면 집에 돌아와 근사한 수영장을 이용하면 된다.


깊은 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배달은 시킨 적도 없다. 아이들은 잠에 들었고 부부만 거실에 남아있다. 이보다 더 불길한 상황이 있을까? 부부는 얼어붙었다. 피식자의 직감. 무기가 될만한 걸 찾아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야구 배트? 클래식하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집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때 침입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안합니다, 계세요?


그런 게 존재한다면 가장 공손한 침입자 상을 받을만한 대사다. 미안하다니, 상황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이 시간에 남의 집을 두드리는 건 대단히 미안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침입자가 문을 두드리고, 계시냐고 물어보겠는가? 그건 바보나 할 짓이다. 아니면 고도로 숙련된 침입자거나. 남편은 자신의 운을 전자에 걸어본다. 문이 열린다.


두 명의 흑인이 서 있다.


<세상을 뒤로하고>는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유별난 소설이다. 멸망하면 떠오르는 그 어떤 클리셰도 적지 않는다. 파괴된 도시, 약탈자가 된 생존자들, 텅 빈 가게, 식료품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총격전, 어두운 하늘, 괴물이 된 짐승들. 대신 이 소설에는 사슴이 등장한다. 한두 마리? 수 만 마리다. 떼 지어 어딘가로 이동한다. 또 플라밍고. 플라밍고 떼가 집 앞 수영장에 나타나 물장구를 친다. 이 나라에 야생 플라밍고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루만 알람은 독자가 원하는 건 단 하나도 주지 않겠다는 심산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간다. 이 제한된 정보가 독자와 등장인물을 하나로 엮는다. 그 누구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사건은 뜩, 하고 등장하고 상황은 극한의 무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감정은 불안과 희망 사이를 널뛰기한다. 별 일 아닐 거야. 집은 튼튼하고, 도로도 멀쩡하잖아. 차도 있어. 조금만 나가면 식료품점도 있고. 지하실에는 구호 물품도 충분해. 그런데 왜 어디서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걸까?


미친듯한 굉음이 하늘을 찢는다. 어른들마저 비명을 지를 정도로 크고 무서웠다. 아기 돼지 삼 형제 중 셋째가 지었을 것 같은, 너무 튼튼해서 영원토록 가족을 지켜줄 것 같았던 집 유리에 눈에 띄지 않게 금이 간다. 갑자기 아들의 이빨이 빠진다. 새빨간 피를 머금은 아들이 손 위에 이빨을 뱉어낸다.


딸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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