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이종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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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취객이 빈 쇼핑백을 들고 버스에 탄다. 승객은 많지 않았지만 좌석은 이미 다 차 있었다. 남성은 악취와 술냄새를 풍기며 좌석들을 노려보다 건장한 30대 청년 앞에 선다. 그러더니 툭, 툭 들고 있던 쇼핑백으로 청년의 다리를 친다. 반응이 없자 남자는 고개를 바짝 들이대 다리가 아프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남자에게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몰려온다. 참다못한 청년이 똑같이 언성을 높이며 말한다. "왜 이러세요!" 그 순간 남자는 들고 있던 쇼핑백으로 청년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쳐 그를 살해한다.


소설의 첫대목을 읽은 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강렬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첫 장면을 작가는 어떻게 풀어나갈까? 뒤에는 수백 페이지가 남아있었다.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으려면 상당한 짜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김칫국은 내가 이 소설을 장편이라고 오해한 데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작가 이종산의 단편선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의 표제작이다.


부커상 최종 후보로 뽑혔으나 수상에는 실패한 <저주토끼>의 저자 정보라는 이 책에 실린 단편선을 일컬어 '여성주의 공포소설'이라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조리와 피로를 공포라는 장르로 빚어냈다. 어지간히도 무던한 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려면 좀 센 맛도 필요할 것이다.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82년생 김지영>을 써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저주토끼>나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을 쓰는 작가도 있다. 다양성은 어느 순간 무조건 지켜야 하는, 다소 정치적인 단어로 변질됐는데 사실은 굉장히 실용적인 이유로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다. 주제가 영원히 싱싱하게 남으려면 이야기는 다양성이라는 외피를 둘러 독자를 질리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접하는 이런 소설들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좋은 시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빈 쇼핑백에 들어있는 것>>에는 지루한 소설들이 꽤 많다. 결말은 뻔한데 전개가 질질 끌리니 이야기의 맛이 살지 않는 것이다. 이 문장을 쓰고 하루를 더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남자여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다. 경찰에 신변 보호까지 요청했으나 끝내 스토킹 범죄로 죽어나가는 여성의 공포를 나는 피부로 알지 못한다. 내가 이 범죄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게 옳지 않기 때문이지, 무섭기 때문은 아니다. 이 공포를 일상에서 마주쳐야 하는 여성에게는 내가 지루하다고 여기는 그 전개들이 마디마디 공감할 수 있는 세심한 묘사로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무서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이야기인 세상. 나는 내가 꽤 알고, 공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끽해야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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