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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년
레이먼드 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8월
평점 :
가히 올해의 소설로 꼽을만한 이야기다. 구성은 김언수의 초명작 <뜨거운 피>만큼 탄탄하고 재미 또한 어깨를 나란히 한다. <뜨거운 피>가 우세를 보이는 부분은 좀 더 현실적이라는 것. 그러나 <마지막 소년>에는 <뜨거운 피>보다 한 뼘이나 웃자란 유머가 있다.
고등학교 소년 바람은 미혼모이자 마약 중독자인 엄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올바로 크는 게 거의 기적에 가까운 환경이었지만 바람은 아주 성실한 소년으로 자랐다. 외박과 가출을 밥 먹듯 하는 엄마를 대신해 살림을 했고 매주 화요일에는 식기를 소독했다. 엄마는 병신과 머저리들만 골라 사귀는 재능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는 엄마를 구타하는 남자 친구들을 때려눕혀 몇 번이나 엄마를 구해냈다. 담배도, 술도, 욕도하지 않았다.
바람의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얼른 커서 입대해 말뚝을 박고 봉급을 엄마에게 보내줄 생각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좀 빠지는 데가 있다면 학교와 공부에 소홀했다는 거? 그러나 어쩌랴. 생존이 더 바쁜 이 소년에게 낭창한 학교 생활은 꿈만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사건은 어느 날 땅콩이라는 사채업자가 엄마가 진 빚을 받으러 오면서 시작한다. 바람은 땅콩의 협박에 맞서 장기매매는 불법이며 이자는 원금의 27.9퍼센트를 넘을 수 없다는 것, 자기처럼 가난하다면 갚지 않고 차라리 파산을 신청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말한 뒤, '어떤 새끼가 그딴 소릴해!'라고 고함치는 땅콩에게 <그것이 알고 싶다>의 김상중으로 맞받아치며 그를 때려눕히지만, 곧이어 다시 쳐들어온 한 무리의 깡패들 앞에서 자신의 삶이 비로소 끝에 다다랐다는 걸 눈치챈다. 바람은 엄마의 남자 친구들과 싸웠던 경험에서 한참이나 어린놈에게 두들겨 맞은 남자는 수치심 때문에 복수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다소 방심을 했던 게 화근이었다. 땅콩은 수치심 따위는 모르는 기대 이하의 잡놈이었던 것이다.
바람은 국어 선생님이 들려준 소설이 생각났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 자신의 누렇고 구멍 난 팬티를 보겠구나, 창피해하며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바람은 장롱을 열어 명절에 입으려고 아껴두었던 BYC 속옷을 꺼내 갈아입고 깡패들을 따라나선다. 군인이 되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바람의 바람은, 그렇게 바람이 되어 산산이 흩어진다.
<마지막 소년>의 작가 레이먼드 조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책 뒷면엔 '순진했던 시절에 보내는 가장 잔혹한 작별 인사, 7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 레이먼드 조의 첫 번째 소설'이라는 광고 문구가 있는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출간된 <마지막 소년>이 70만 부 팔렸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내가 손에 든 이 책이 이미 70만 부가 나갔다는 말인가? 아무튼 <마지막 소년>은 레이먼드 조의 첫 번째 소설이 맞고 그는 70만 부나 책을 판 베스트셀러 작가가 맞다. 레이먼드 조는 <마지막 소년> 전까지는 오로지 자기 계발서만을 써온 전문 작가였던 것이다.
70만 부의 책을 파는 동안 어떻게 소설 쓰기를 참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 소년>의 레이먼드 조는 애초에 소설가로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반짝반짝한 재능이 담겨있다. 덕분에 '엘릭시르'라는 이 문학동네의 장르 소설 임프린트도 알게 됐는데, 지금 이 출판사의 책들을 정주행 중이다. 레이먼드 조와 <마지막 소년>은 올해 가장 값진 수확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