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팔이 의사
포프 브록 지음, 조은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R. 브링클리는 20세기 초반 미국을 주름잡은 외과 의사였다. 그의 시그니쳐 수술은 1917년에 시작된 '염소 고환 이식술'이었다. 염소 고환 이식술은 말 그대로 염소의 고환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으로 발기 부전이나 불임을 치료하고 감퇴한 정력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염소 고환 이식술은 미신과 과학이 절묘한 합을 이룬 완벽한 사례였다. 왜 개, 소, 말도 아닌 염소의 고환이었을까? 키워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악마 수염을 기른 그 동물이 얼마나 '음탕한'지를. 신화에서 음탕한 악마로 대변되는 '새티로스'도 염소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이었다. 왕성한 정력이 뿜어져 나오는 근원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살로 된 두 개의 구슬이었으니 그걸 내 몸에 연결할 수만 있다면 염소의 파괴적 정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축제가 된 카니발도 사실은 왕을 죽여(큰 힘을 가진 자) 그 살을 나눠 먹는 풍습이었다. 뛰어난 힘을 가진 뭔가를 내 몸에 흡수시켜 그 힘을 취할 수 있다는 건 심리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다. 유례없이 많은 자식을 낳은, 그토록 영민한 세종대왕께서도 보양식으로 닭의 고환을 즐겨먹었다지 않은가!


브링클리 박사는 순식간에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됐다. 물론 미국인의 지적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기에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급속도로 지지를 얻으면 그 반대도 비슷한 속도로 세를 이루는 법이다. 브링클리 박사에겐 그 바닥에서 가장 유명한 돌팔이 사냥꾼 모리스 피시바인이 붙었다. 모리스 피시바인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선 패자가 더 많은 것을 가져갔다. 브링클리는 더 큰 부자가 됐다.


정부 당국과 끝없는 충돌을 겪다 지친 박사는 아예 그 정부를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는 주지사에 출마했다. 막대한 돈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유세를 벌였는데, 그는 단순히 돈만 많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애초에 의학이라고는 단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는 돌팔이가 어떻게 그 위대한 America를 쥐락펴락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홍보의 대가였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욕망을 정확히 겨냥했다.


당황한 사법부과 행정부는 선거에서 그를 제거할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선거위원회는 단 한 가지 표기 'J.R. 브링클리'만을 유효표로 인정하기로 했다. 브링클리 박사님, 브리크리, J. 브링클리 등은 무효라는 말이었다. 브링클리는 라디오를 통해 행정부의 비열함을 규탄했고 마지막 집회에 치어리더들을 동원하여 철저히 주입시켰다. J 점찍고! R 점찍고! 브링클리!


브링클리가 유권자들을 집결시킨 전략은 도널드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 전략과 비슷했다. 일명 지식인이라 불리는 오만한 엘리트들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무식한 보수 꼴통이라 불렀다. 브링클리는 지지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브링클리를 찍는 사람들은 달이 생치즈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고요. 그들은 여러분들을 돌대가리라고 불렀어요."(p. 244)


무소속으로 출마한 브링클리는 183,278표를 얻어 3위를 차지한다. 만약 투표용지에 그의 이름을 올릴 수만 있었다면 사실상 주지사에 당선되고도 남을 득표수였다. 1위와 2위의 표차는 고작 251표에 불과했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은 감히 재검표를 요구할 수 없었다. 앙숙인 두 당은 유례없이 신속한 합의를 이뤄냈다. 재검표가 3위를 차지한 브링클리를 주지사로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20세기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옛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그런가? 오늘날 넘쳐나는 건강식품, 노화 방지, 피부 미용을 위한 온갖 비책, 시술들을 보면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가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는다. 면허 없는 살인자, 천재 악마, 연쇄살인마로 불리는 돌팔이 의사 존 R. 브링클리가 요즘 세상에 살았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조금만 노력해도 우리 주변의 존 R. 브링클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4-04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내용이네요. 무서워요. 우리나라에서도 허경영씨 대선 나오면 찍는 사람 많잖아요. 전에 무슨 프로보니까 공중부양 배우러 허경영씨 강연이랑 무슨 연수원 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대요 ㅎㅎ

한깨짱 2021-04-05 13:55   좋아요 0 | URL
허경영 하늘궁이라는 곳이 경기도 양주에 있다고 합니다. 눈빛만으로도 질병을 치료하는 허경영씨 관련 굿즈를 판매하고 그럴듯한 숙박시설까지 갖춘, 엄청난 규모라고 하네요. 유튜브 보면 허경영씨 만날라고 모인 사람들이 꽤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