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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1 - 에스파냐 - 빛과 그림자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109
홋타 요시에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의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현실에 참여하는 고발성 명화부터 말년의 정신세계를 그린 독특한 작품까지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화가다. 이 책은 고야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일종의 평전으로 총 4권의 방대한 양이다.
먼저 1권은 에스파냐 - 빛과 그림자편으로 그가 직업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고야는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사라고사의 엘 필라르 대성당의 천장화를 그려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서른 살 때부터 16년 동안 왕립 산타 바르바라 태피스트리 공장을 위해 약 63점의 밑그림을 그린다. 이 무렵에는 종교화도 많이 그렸는데 그 시절을 주로 다루고 있다.
평전의 작가는 일본의 저명한 역사연구자 겸 작가인 훗타 요시에로 전후시대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적 작가이지 사상가로 존경을 받는분이다. 1974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하여 1977년 4부작으로 완성한 [고야]로 '오사라기 지로상', '알폰소 10세 십자상', '아시아-아프리카 로터스 상'을 받았다. 1978년부터 10년 동안은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 거주하면서 서양의 사상사, 지성사, 문화사를 폭넓게 탐구하였는데, 이는 그의 저작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홋타 요시에는 인간, 종교와 예술 전반에 걸친 심오한 이해와 통찰력으로 한 시대의 압도적인 자료를 통해 그 시대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내 왔다. 이 책은 사실에 입각하여 고야의 삶을 객관적이고 치밀하게 탐색한 고야 연구서이다. 나머지 3권을 읽기 전에 먼저 포스팅한 이유는 이 책은 평전이지만 문학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상당히 세련된 작품이다. 소개글을 통해 어떻게 이 작품이 씌여졌는지 알아보고, 다음권들을 차례로 독파할 예정이다.
고야는 언제나 위대하다
왜 고야인가? 저 먼 과거에, 그것도 유럽의 ‘변경’에 지나지 않았던 에스파냐 출신의 화가를 왜 오늘에 만나야 하는가? 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그림을 보면 될 터인데, 왜 그를 책으로 만나야 하는가?
고야는 모국인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사는 물론이고 정신사ㆍ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거인이다. 그는 또한 근대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변혁과 혁명의 물결들을 회화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작품을 통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삶과 예술을 준열하게 증언하고 있는 영원한 현재진행형 화가이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연구자 겸 작가인 홋타 요시에가 역사와 인간, 종교와 예술 전반에 걸친 심오한 이해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일구어낸 이 책에서 독자는 저자가 제시하는 방대한 자료에 압도당할 것이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간군상의 파노라마에 금세 매료될 것이다. 그동안 고야의 전기는 많이 나왔으나 이처럼 사실(史實) 앞에 엄격하면서도 모든 사가들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고야 연구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책의 전권에 걸쳐 고야의 전 생애와 작품을 다루면서도 작품의 진정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17세기 에스파냐의 황금기, 18세기 유럽 왕실경영과 프랑스혁명, 19세기 대불항쟁과 전제정치, 20세기의 내란과 프랑코 정권 등에까지도 그 서술의 폭을 넓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야의 동시대인들, 각국의 대문호와 예술가들의 사상과 지적 경향이 정교하게 엮인 그물처럼 고야의 예술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시대의 거인
저자는 고야가 모순적이고 불연속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에 와서 보면 결과적으로 가장 독창적인 화가였지만 18세기 후반 사라고사에서의 화가 지망생 시절부터 마드리드의 아카데미 정식회원이 되기까지 그 걸음을 더듬어가 보면,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자유롭고 비약적으로 키우려고 애쓰기보다는 시대의 화풍에 순응하고 동화하기 위해 숨차게 달려갔던 출세지향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심연을 겪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계로 들어갔을 때부터 고야는 비로소 미래의 장막, 현대회화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고야를 평생 따라다녔던 에스파냐 당대의 참혹한 현실, 즉 음모와 전쟁, 혁명과 반혁명 등이 그를 깨어 있는 시대의 증언자로 몰고 갔음을 강조한다.
고야가 현대회화의 첫발을 내디뎠다고 평가되는 판화집 『변덕』 가운데「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작품에 직접 부연한 그의 설명을 읽어보면 고야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근대 리얼리즘의 태동을 감지할 수 있다. “이성에 버림받은 상상력은 있을 수도 없는 괴물을 낳는다. 이성과 하나로 합쳐져야만 상상력은 예술의 어머니가 되고, 그 경이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이성과 상상력의 힘으로 고야는 다양한 인간적 정념,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 동시대인들의 악덕과 비참함을 풍자하고 비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판화집 『전쟁의 참화』
고야에게서 시작된 진정한 근대성은 판화집 『전쟁의 참화』에 와서야 비로소 극적으로 표출된다. 그가 평생 추구하던 수석 궁정화가의 지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에스파냐 궁정에 급작스런 정변이 일어나고(1808),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아 영국 군대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는 사태를 맞는다. 이 과정에서 에스파냐 민중들의 독립전쟁이 거세게 일어나고 상대방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참극으로 인해 에스파냐 전역이 피로 물든다(1808~14). 나폴레옹 군대에 저항한 에스파냐 민중의 애국적 봉기와 전쟁의 참상을 담은 이 판화집에서 고야는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느낀 그대로를 그려냄으로써 표현의 자유와 현실성을 동시에 획득한다.
1814년 프랑스의 조제프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형)가 축출되고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7세가 복귀하자 고야는 대작 「5월 2일」과 「5월 3일」을 발표한다. 외세 침략 때 봉기한 민중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장면이 담긴 이 작품에서 고야는 위대한 영웅도 혁명가도 아닌 이름 없는 민중의 처절한 몸부림을 생생하게 부활시킨다. 이리하여 회화의 주제에는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인간의 추악함, 야수성의 표현이 들어가 에스파냐인들 앞에 당당히 자리 잡는다. 고야는 이제 종래 미술사의 문을 닫고, 현대회화의 문을 활짝 열었다.
복귀한 페르난도 7세의 악명 높은 반동정치와 종교재판소의 칼날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을 때에도 고야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창조의 정열을 불태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집 『투우』『난센스』『C화집』『E화집』 등에는 70대 노화가의 작업으로 보기에 어려운 정념과 투혼이 살아 숨쉰다. 왕에서 시작하여 귀족과 성직자, 부르주아지, 게릴라, 프롤레타리아트, 거지와 죄수에 이르는 에스파냐 사회의 모든 계층의 중심에 고야는 우뚝 버티고 서서 그들의 운명인 허무를 포착해낸다.
역사책인가, 문학작품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고야와 그의 가족, 당대 모든 인물의 사생활을 남김없이 파헤친다. 고야가 40년 동안의 결혼생활에서 아내 호세파에게 스무 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게 하고,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남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일이라든가, 그의 초상화 모델이 되어주었던 여자들과의 숱한 염문, 에스파냐 궁정의 추악한 성문란 등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흥미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고야의 작품과 그의 시대를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이 책을 두고 “과연 이것이 역사책인가, 문학작품인가” 하고 설왕설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적인 구분은 옳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역사서인 동시에 문학작품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싶다는 욕구
홋타 요시에가 이 글을 쓸 무렵 보통 에스파냐라면 카르멘과 플라멩코의 나라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카르멘과 플라멩코가 정통 에스파냐와는 다른 부류에 속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던 게 실정이었다. 카르멘은 집시여서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고 플라멩코는 에스파냐어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역시 귓등으로 흘려듣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에스파냐의 역사에 화가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고야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게다가 고야가 살았던 시대와 화가 자체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때까지 작가로서 중국을 비롯하여 인도와 유럽 등지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을 써온 작가에게도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독일·이탈리아 같은 유럽 중심부의 역사에 관해서라면 독자들이 어느 정도의 예비지식을 갖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에스파냐 역사에 관해서는 그런 기대를 갖기도 어려웠다.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직접 현장을 방문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미술관 등에 공개되어 있는 고야의 그림은 거기에 가면 볼 수 있었지만,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작품은 사유재산인 만큼 쉽사리 접근할 수도 없었다. 알바 공작 저택에 들어가는 데 3년이나 걸린 것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고, 사유재산인 고야의 작품을 왜 당신한테 보여주어야 하느냐는 대답이 돌아올 때는 절망이었다. 게다가 고야의 작품은 독일·이탈리아·프랑스·남북아메리카·스코틀랜드 등지에 흩어져 있었다.
어려움은 그밖에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작가를 움직인 것은 앞에서 말한 젊은 시절의 감동만은 아니었다. 유럽의 근대와 현대라는 것이 어떤 역사적 경과를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는 작가의 끈질긴 지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소개글 발췌)"
평전을 읽으며 고야가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일뿐더러, 그가 어떤 생애를 살아갔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헤밍웨이의 말을 올려본다
"고야는 보고, 느끼고, 만지고, 쥐고, 냄새 맡고, 먹고, 올라타고, 부러뜨리고, 함께 자고, 의심하고, 관찰하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괴했던 것을 믿었다. 어떤 화가도 이 모든 것을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고야는 바로 이것을 시도했다.”- 헤밍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