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결과‘라는 말조차 무한 책임론에 일정한한게를 도덕적으로 부과한다. 주어진 결과 ( lot)‘라고 말할 때 그것은어떤 운명이나, 우연이나,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정해져 주어진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넘어서 행운 또는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로써 우리는 소득과 직업은 능력 문제가 아니라 신의 은총 문제라는 옛 논쟁을떠올린다. 그런 것들은 우리스스로 얻는 것들인가, 받는 것들인가?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7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능력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선행에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일체부정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후계자들에게 치열한 능력주의 윤리의식을 가져왔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는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뱅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 이상 제어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구원은 힘써 얻는 것이며, 직업은 그 수단이지 단순한 증표가 아니다. 베버는 이렇게 본다. "이는 실질적으로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뜻이다. 따라서 칼뱅주의자는 때때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 자라고표현하고, 더 정확하게는 자기 구원의 확신자라고 표현한다." 일부 루터파는 그런 견해가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교리로의 후퇴"를 의미하며 그 교리야말로 루터가 신의 은총에 대적하는 것으로 배척했노라고 비판했다.16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이아니다.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윤리의식은 큰 부를 축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과 함께, 자수성가의 어두운 면이라 볼수 있는 ‘불안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초래한다. 은총 앞에서 느끼는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20
그러나 진보적 신학자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인간 능력을 강조했을 때, 성공은 개인의 능력과 섭리적 계획의 일치를 나타내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검리론은 때로는 지지부진하고 때로는 멈추기도 하면서, 그렇지만 확실하게 경제적 현상 유지를 정신적으로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섭리는암암리에 부의 불평등을 지지했다.2
념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보험 요건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시키는 보험회사의 시스템은 다만 비용-편익 분석상 타당할 뿐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 몸이 아픈 사람에 대한 더 중대한 조망은 "선한 삶을 살았다면 건강하리라. 제대로 산 만큼 자기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리라. 그리고 정도만 걸어온 사람은 들어간 비용에 비해 믿을수 없을 만큼 큰 소득을 얻으리라"는 신념으로 잊혀진다. 4
둘째, 역사가 예측한 대로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화의기반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옐친이 아닌 푸틴이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적어도 그가 러시아를 독재적으로 통치하면서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는 점을 보자면 말이다. 시리아에서는 폭압적 통치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가 치열한 내전을 거치고도 건재했으며, 그런 점에서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던 셈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정권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킹과 파커의 입을 통해 도덕 세계의 궤적이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는믿음은 부정의에 맞선 싸움을 위한 크고 예언자적인 외침이 되었다. 그러나 똑같은 섭리론 믿음이 약자들에게는 희망을, 강자들에게는 오만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자유주의의 감각 변화에서찾을 수 있다. 민권의 도덕적 긴급성에 대한 감각이 냉전 이후 자족적인 승리주의 감각으로 바뀌어 버렸다.
능력과 은총 사이의 균형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청교도들에서부터 번영 복음 전도자들까지, 성취의 윤리학은 거의 저항할 수 없을 만클의 수확이었고 언제나 보다 겸손한 희망과 기도의 윤리학, 수혜와 감사의 윤리학을 압도했다. 능력주의는 우리의 은총을 추동하거나 그 자체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은총을 받았다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돈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내가 중국 방문때 만났던 학생들의 도덕적 직관, 또한 지난 십여 년간 다수의 중국 대학에서 배양된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문화적 차이에도불구하고 이 중국 대학생들은 우리 하버드대 학생들처럼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은 사람들이며, 그 경쟁의 배경에는 치열한 시장사회의 경쟁이 있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 성공했고 따라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에는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않다.
오바마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능력주의를 지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지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다. 따라서 여기서사회적 상승 담론과 능력주의 윤리가 한 데 엮인다.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출세할 수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이 일궈낸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정치인들이 제대로 먹히지도 않는 공허한 말을 지겹도록 반복할 때는, 그것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심증이 가게 마련이다. 바로 사회적 상승 담론이 여기에 들어맞는다. 불평등이 위험수위까지 올라왔을때 이러한 담론이 가장 구역질나게 들렸음은 우연이 아니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보다 더 많이 벌고 있으며, 중위소득이 40년 동안 줄곧 제자리걸음만 한 상황에서, ‘노력하고 열심히일하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을 리 있겠는가.
이러한 빈말은 두 종류의 불만을 낳았다. 하나는 체제가 능력주의적약속을 충족하지 못함에 따라 나타나는 불만으로,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한 사람도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빚어졌다. 또 다른불만은 능력주의적 약속이 이미 지켜졌고, 자신들은 볼 장 다 봤다는절망에서 우러났다. 후자가 더욱 사기를 떨어트리는 불만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뒤처졌으며 그 잘못은 순전히 자신들에게 있음을 의미했기때문이다.
사회적 상승 담론이 야심적이며 아직 달성되지 못한 저 너머를 약속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에는 이미 이루어진 현실만을 축복하게 된다. "여기 미국에서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출세할 수 있습니다." 호소력강한 담론이 으레 그렇듯, 야심과 축복을 하나로 뒤섞는다. 희망은 긍정하되 현실에서 그 희망을 이룬 자들에게 한정된 축복을 보내는 것이다. 오바마의 언급은 그런 점에서 되새길 만하다. 2012년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는 어떻게 생긴 사람이든 어디서 온 사림이든 따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기만 한다면 재능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면 됩니다.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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