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이디푸스 : 그 정화 의식이라는 게 어떤 거란 말씀인가? 어떻게 해서 깨끗하게 하란 말씀인가?

크레온 : 한 사람을 추방하거나 아니면 피를 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만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책은 1998년 여름, 공교롭게도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까발려진 계절에 시작한다. 화자(네이선 주커먼)의 말에 따르면 ‘그해 여름은 대통령의 성기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을 점령하고 있었고, 부끄럼을 모르는 온갖 추잡함으로 얼룩진 인생이 다시 한번 미국 전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았던 계절이었다.’ 그리고 이 여름은 화자의 이웃인 71살의 콜먼 실크가 34살의 포니아 팔리와 애인이던 계절이다.

                                   

  콜먼과 포니아 콜먼은 16년 동안 아테나 대학의 학장으로 지낸 학자였으며, 2년 전 ‘검둥이들’사건으로 인해 교수직을 사직하고 혼자 지내고 있었다. ‘검둥이들 사건’은 그가 강의시간에 출석을 부르다 5주 동안 나오지 않은 학생들에 대해 “이 두 학생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없나요?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spooks)인가요?”라고 말해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가 사용한 유령들(spooks)란 단어는 비속어로 흑인, 검둥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그 학생들이 실제로 흑인임이 밝혀지면서 콜먼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의혹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의혹에 콜먼은 설명해야 할 필요성도 느낄 수 없었지만, 대학 측의 요구와 시민단체의 분노에 변호사를 선임하고, 면담을 하게 된다. 거듭되는 압박과 대학사회에서 이제는 소외된, 능력 있던 콜먼은 점점 분노로 일그러진 사내가 되고, 급기야 그의 아내 아이리스마저 세상을 뜬다. 

 콜먼은 화자의 집으로 찾아와 “아내가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죽었다고, 자네가 이 사건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고 명령이라도 하듯 소리쳤었다. 그러나 콜먼은 자신이 2년 동안 써온 ‘검둥이들’책 집필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고 네이선에게 말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역겹고, 변명하는 글에 지나지 않아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콜먼이 시작하게 된 사랑에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포니아 팔리. 그것이 그의 일흔한 살에 찾아온 마지막 볼룹타스였다. 포니아 팔리. 34살의 우체국, 아테나대학의 청소부, 낙농업 일을 하는 여자.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데다가 계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과거를 지닌 여자.

   콜먼 실크.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학자. 16년 동안 학장으로 지내온 능력있고 정력적인 남자. 그러면서도 학자처럼 딱딱한 것이 아니라 남자로서의 매력도 넘치는 사람. 하지만 이제는 대학사회에서 추방당한, 스스로 소외시킨 남자.

   
  이 둘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서로 놀라울 만큼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인생의 끝에 다다라 함께하게 된 두 사람. 말할 것도 없이 이 둘이 같이 하게 된 것은 콜먼의 불행이 그리고 포니아의 불행이 교차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콜먼이 대학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그에 앞서 ‘검둥이들’사건이 없었다면....... 포니아가 어렸을 때 계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하지 않았다면……. 교차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인연이란 말이다. 이 둘의 결합은 아마 둘 다 잃을 것이라곤 없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71살의 나이에 더 바랄수도 없게 된 남자와, 세상물정을 다 아는 것처럼 사는 여자.

   “일흔한 살 된 노인과 같이한다는 게 자네에겐 어떤 거지?” “일흔한 살 된 누군가가 어디가 어때서요. 이제 굳어질 대로 굳어져 변할 일이라곤 없어 좋은데.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잖아요.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 일도 없고.” 
 포니아의 말은 그녀가 왜 콜먼을 좋아하는지 알게 해준다. 더 이상 변할 일이라고는 없는 남자. 그녀를 더 이상 위협하지도 않고, 그녀에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지도 않는 남자인 것이다. 둘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에서 나아가 서로가 서로에게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과도 같았다. 

   레스 팔리   레스 팔리. 그는 포니아의 전남편이다. 베트남전에 두 번이나 참전한 재향군인. 그는 포니아가 자신의 아이 2명을 살해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혼한 뒤에도 그녀의 뒤를 밟아 종종 위협한다. 레스 팔리는 참전하기 전까지 태평한 성격에 친구도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그는 변했다. 그는 베트남전이 끝난 뒤에도 베트남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2번째로 참전해서는 흔히 말하는 ‘전쟁광’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되었다. 그는 미국이 원해서 간 베트남에 간 뒤, 정부에게서는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재향군인병원에 수감되어 치료를 받고 나온 그는 그와 같이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루이’를 만나 치유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른바 ‘추모비와 마주하기’ 베트남전에서 함께했던 이제는 죽은 전우를 마주하고 그로인해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이를 위해 레스는 황인종에 대한 혐오증과 살인욕구를 억제하기 위해 ‘중국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먹기 훈련을 한다. 하지만 그는 죽은 케니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그 이유가 아직 자신이 끝내지 못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은 바로 ‘포니아와 콜먼 없애기’였고, 레스는 바로 그날 돌아와서 그 일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델핀 루  델핀 루. 콜먼이 아테나대학 학장시절 임용한 프랑스 출신의 젊은 여자 교수이다. 엄청난 자의식과잉과 지적허영으로 이루어진 여자. 그 과잉과 허영에 둘러싸여 주위에 비서밖에 남아있지 않은 여자. 콜먼이 ‘검둥이들’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이를 주도한 교수이다. 콜먼이 포니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콜먼에게 경고장을 보낸 사람이다. 콜먼에 대한 대결의식에 사로잡힌 듯한 여자. 그렇지만 그녀가 그리는 이상형이 바로 ‘콜먼’이었으니, 루 교수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느낀 경악감은 얼마나 컸을까. 아마 그녀가 콜먼에게 그리 집착했던 것은 자신이 콜먼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이 델핀 루 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갈수록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자신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생긴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추어 버리는 인물. 콜먼이 델핀 루의 임용면접 당시 끌렸던 이유는 아마 콜먼 자신의 젊은 시절과 델핀 루가 조금이나마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만할 정도로 높은 자존감과 수려한 외모. 그리고 델핀 루가 콜먼을 싫어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 기인할 것이다. 서로 닮은 사람들은 끌리거나, 아니면 멀어지려는 속성을 띠기 마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콜먼과 포니아는 함께 트럭을 타고 가다, 레스 팔리가 유도한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들은 그렇게 무성한 소문을 다시 한번 낳으면서 ‘자기들만이 성자인척 하는’ 사회에서 사라졌다. 네이선은 콜먼과 포니아의 장례식장에 참여하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 밝히려 한다. 그리고 콜먼의 장례식에서 콜먼의 여동생, 어니스틴을 만난다. 그리고 콜먼이 평생동안 감추어왔던 비밀에 대해 알게 된다. 바로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그가 강의실에서 쫓겨나게 만든 ‘흑인, 검둥이(spooks)'라는 사실을. 콜먼 자신이 백인으로 살아온 인생으로 인해 그 자신의 온 삶을 바쳐온 자리에서 쫓기다시피 하게 된 아이러니를. 
     

  어쩌면 처음부터, 콜먼이 백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할때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콜먼의 어머니가 그에게 했던 말. " 이제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네게 도망칠 길은 없고 네가 도망치려고 발버둥쳐도 결국 네가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될 거라는 거란다. 그건 네 아버지가 네게 늘 하던 이야기잖니." 어머니의 말대로 그는 자신이 벗어나려고 했던 '흑인'이라는 집단이름에 의해 그 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정화의식이 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