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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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무리 남과의 관계가 돈독하다고 해도 혈육을 나눈 것에 미치지 못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어느 누구에게나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낮선 타인으로부터 기인하는 어떤 부정적인 시선이나 행동에 상관없이, 자신을 보호해주고 감싸주며 진정한 사랑의 기운을 느끼게 만드는 가장 든든하면서도 신뢰할만한 한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대적인 면도 있어서 기대가 많으면 그만큼 실망도 커지는 것처럼, 행여 가족 간에 뜻하지 않은 불미스러운 문제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면, 상처를 받는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다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스런 아픔으로 남게 될 것이고,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때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뜻하지 않은 문제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거나, 혹은 자신에게 더 이상의 유의미한 것으로 인식되지 못할 때, 언제든지 자신의 의지로 그 인연의 끈을 과감하고 냉정하게 잘라 내버리고는 한다. 하지만 가족의 경우에는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또한 인위적으로 회피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가족이라는 관계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항상 긍정적인 면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유교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영향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족에 대한 그동안의 우리의 대체적인 인식은 다소 폐쇄적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무리 불편하고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참아야 하고 설사 상처받는 일이 있다 해도, 그것을 혼자 속으로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왔는지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한 가족의 불행하고 어두운 질곡의 역사를 애틋하면서도 섬세하게 다루어 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가족과 자기 자신이라는 관계의 설정을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의미 있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작품은 3대에 걸친 어느 가족이 겪어야만 했던 가슴이 아릴만큼의 애틋하면서도 고단한 삶을 회고한 것으로, 회한과 비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화해와 희망을 음미할 수 있는 조금은 특별한 느낌의 가족사를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모두 6편의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의 단편 그 자체만으로도 한편의 작품성 있는 소설로 치부해도 될 정도로 문학의 풍미를 자랑한다. 소설 첫 꼭지의 이야기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한때 깊은 사랑에 빠진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가족이라는 둥지를 떠나 방황하는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내용은, 사랑 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즉흥적이면서도 일시적인 사랑을 즐기는 것에 이미 익숙해진 집안 막내의 이야기와, 자신의 친오빠인줄 모르고 사랑에 빠졌다가 나중에서야 밝혀진 가족사의 비밀을 알고, 타인과의 이성적인 관계에 불편함을 느끼는 셋째의 안타까운 심정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연이어 등장하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장남의 이야기는, 아내와의 권태기를 이기지 못하다가 급기야는 사내 여직원과 불륜에 빠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외유하는 모습이 나타나있고, 한편 고등학교 학생인 그의 딸은 어린 시절 단짝 친구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지만 외면을 당하고, 설상가상으로 학급에서 왕따로 취급되는 등의 혼란스런 청소년기를 보내는 가슴 아픈 상황이 전개되어 있다. 이 작품은 어느 단편을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들만큼 저마다의 이유 있는 사연들이 눈에 띄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버지가 과거를 회상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는 전쟁이라는 아비귀환의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참혹하고 끔찍한 위안부의 실상을 접하게 되는데, 이 점은 훗날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와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부분보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아버지라는 한 개인의 인생으로부터 파생된 질곡의 역사가, 이후 세대로 침착되어 전이되는 과정이 애잔하게 다가오는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그 본연의 가치와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이 소설은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각 단편의 유기적인 구성의 묘미와, 이를 바탕으로 공감을 느끼게 하는 감성적인 문체와 서술,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내용 안에서 독자들이 몇 가지의 의미 있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얽매여 가족의 구성원이 겪어야만 하는 희생과 파멸의 비극적인 일면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홀로 감수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우리 현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도, 독자들은 주목해 볼 만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결말의 과정에 펼쳐져 있는, 아버지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위안부와 관련한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작가는 이 부분과 연관해서 전쟁의 추악함이나 잔인성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더러워진 몸으로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어느 위안부 여성의 비참하고 처절한 절규의 모습을 통해, 가족을 향한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소명의식 같은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의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부모로부터의 아낌없는 사랑과, 형제와 자매라는 관계에서 형성되는 친밀한 유대감을 기반으로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가족이라는 것은 예기치 않은 불행한 일이 있는 경우에라도,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안에서 누구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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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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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 반다인은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 간의 공정한 지적 게임이므로 페어플레이를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의 여러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원칙에 부합된 작품들은 대개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만약에 그러한 원칙이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됐다면, 우리는 아마도 추리가 주는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추리소설이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얻으면서, 그러한 일종의 암묵적인 원칙들은 대부분 유명무실화되었고, 그러한 결과로 독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추리작품을 맛볼 기회를 얻었다. 물론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추리를 즐기려는 일부의 독자들에게는 지적유희에 대한 부분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이 여전한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사실 추리소설과 관련해 그 내용의 전개가 너무 대중적인 면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아무래도 작품성에 문제점이 대두될 수밖에 없고, 반면에 작품성에 치우쳐 거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추리를 읽는 독자의 흥미는 그만큼 반감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가급적, 그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만족하는 작품이라면 아마도 더 없는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위에 언급된 추리소설을 보는 독자들의 상반되는 인식, 다시 말해 추리소설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만족하게 해주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해본다. 그러한 이유로 이 작품은 본격적인 미스터리추리물로서의 흥미는 물론이고, 사건 배경의 그 이면에 우리가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기대 이상의 깊은 인상을 남겨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사건의 발단은 정년으로 퇴임하여 꽃을 가꾸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아 살아가는 어느 노인이 누군가에 의한 타살이 의심되는 석연치 않은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의 증거나 피해자 주변 인물들의 탐문 조사 결과를 근거로, 어떤 특이점도 찾아보기 힘든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간주하고 만다. 그런데 노인의 죽음을 맨 처음 발견한 손녀딸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키우던 노란 꽃의 화분이 사라졌음을 알고, 그것이 이번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베일에 가려진 용의자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당시 사건 현장에서 도난당한 노란 꽃이, 오래전 에도시대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맞닿아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미궁 속에 놓인 사건의 진실에 한 발자국 다가서며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새로운 국면을 맞기에 이른다. 대부분의 많은 추리소설들이 하나의 프롤로그에서 시작되어 그 안에서 모든 내용을 다룬다면, 이 작품은 본격적인 미스터리 범죄사건을 전개하기 이전에, 각기 다른 내용의 두 개의 프롤로그로 진행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점은 풍부한 서사를 통한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사전에 미리 암시하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펼쳐질 것을 예고한다. 그리고 두 개의 프롤로그는 결말 부분에 가서 공교롭게도 마치 흩어져 있는 퍼즐 조각이 신비롭게 맞춰지는 것처럼, 묘한 일치를 이루면서 미궁에 빠진 사건의 해결과 함께,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에필로그의 과정으로 승화되어가고 있어 독자들의 주목을 이끈다. 특히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등장하는 인물들 저마다의 애틋한 사연이 복합적으로 연결되는 다채로운 서사가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추리소설을 보는 즐거움을 한껏 배가시켜주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주목되는 것은, 추리소설은 다른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최대한 부합하면서도, 더불어 전개되는 이야기의 이면에 의미 있는 내용을 담아 이를 독자들에게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추리소설이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살펴본다면, 작품 속 사건에 관해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누가 범인인지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은 미스터리의 흐름을 지속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극대화하고 있음은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반전의 효과로, 드라마틱한 구성의 묘미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추론이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추리물이 지녀야 하는 기본적인 요소이자 매력의 한 부분이기도 해서 결코 빼놓을 수 없을듯하다. 한편 작품의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사건의 모티브가 되는 노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용의자를 찾아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것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사건과 연계된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단절된 가족 구성원 간의 화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와 같은, 인문학적인 면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에도시대에 노란 나팔꽃으로 명명된 몽환 화를 매개로 하여, 풍부한 서사와 그에 따른 작가의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얼마만큼 흥미를 이끌어 줄 것인가 하는 추리의 대중적인 요소와 그에 더하여 하나의 사건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우리의 불미스러운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 공감 내지는 담론의 필요성을 내포한 유의미한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듯하다. 사실 많은 추리물이 소개되고 있지만 아쉽게도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만족할만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그러한 독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 주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추리 장르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이 작품을 통해 추리의 묘미를 즐기는 것과 더불어 가슴이 따뜻해지는 공감의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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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해도 괜찮아 - 심리학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민규 지음 / 더난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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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흔히 토로하는 고민들 중에 한 가지는 자녀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립해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주로 10대의 자녀를 둔 부모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10대의 자녀와 그 부모의 연결 관계를 살펴보면 표면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여있지만 사실 그 속내의 실질적인 거리는 생각보다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을 보이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중학교 즈음의 으레 겪게 되는 사춘기에서 비롯되는 반항적인 면과, 상대적으로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미래가 희망적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이에게 주입되는 강요적인 부분이 서로 상충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생각해볼 것은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기인하는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 어떠한 근본적인 해결점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가슴에 상처만 남는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벌어진 자녀와 부모의 거리는, 향후에도 쉽게 좁히기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많은 교육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미래보다는 현실 지향적인 반면에 부모들은 현실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이런 연유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는 결국 부모와 자녀 간에 사소한 의견대립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이 격차는 점점 심해져서 그동안의 친밀한 유대관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언젠가 회복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방치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자녀와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부모들이 겪는 난관의 문제점을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하는데,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자녀를 둔 부모라면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기를 권해본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평소에 부모들이 자녀들과 대화를 진행함에 있어 생겨나는 여러 오해의 소지들과 연관하여, 부모가 이에 대해 아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것인가 하는 부분에 그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특히 책 속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청소년들이 고민하고 있는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어서, 부모들이 읽어봐도 좋을 듯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한번 읽어보기에는 더 없는 유익한 책이 될듯하다. 경쟁이라는 체제에 얽매여 이를 수용하고 살아가야 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아무래도 자신의 어깨에 짐 지워진 압박감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에 오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주어진 자신의 문제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아이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의 문제를 크게 세 가지의 측면에서 분류하여 다루고 있다. 먼저 그 첫 번째 테마는 아이들이 종종 부딪치게 되는 부모와의 대화와 관련한 것으로서, 유기적이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 어떤 관점과 인식의 필요성이 요구되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로 이 책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이 자신의 미래와 관련지어 향후 목표설정에 대한 가치관 및 세계관에 대해 어떻게 규정해 나갈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아이 스스로가 주도적인 입장이 되어, 보다 효과적인 시간 및 학습관리를 능동적으로 가능할 수 있게 만드는 대안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이의 학습 성적에 관한 것으로서, 지금까지의 공부 방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앞으로 성적향상에 위한 그 기술적인 방법을 폭넓게 살펴보고자 했다.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다 똑 같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부모가 의도하고 생각한 방향대로만 흐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학부모들은 자녀와의 이해관계차이에서 오는 문제로 남모를 고통을 안고 있으며, 한편으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의 권위의식에 따른 일방적인 강요나 압박으로 인해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다. 한번 어긋난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의외로 그 골이 깊어서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부모는 그러한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그러한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이를 언제까지나 수수방관만 할 것이 아니라 그 해결책을 하루빨리 모색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개인적으로 이 책이 담고 있는 저자의 조언은, 부모들이나 아이들이 겪는 문제점에 대해 그 해결방안을 마련해주는 지침서로서 좋은 활용서가 될 것으로 보이며, 아울러 향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가교로서의 역할에 제 몫을 충분히 해줄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아이들이 흔히 접하게 되는 다양한 고민의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갈 것 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학습능력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지, 열등감이나 슬럼프와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좌절을 겪었을 때에라도 이에 굴하지 않도록 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실천 가능한 방법을 세분화 하여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와의 어떤 문제로 아이와 대화하는 것이 어색하거나, 혹은 조언을 해주고 것이 있어도 그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아이로 하여금 이 책을 한번 읽도록 권해본다면 기대 이상의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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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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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하여 깊은 고민을 해봤을 것이다. 단순히 부나 권력 혹은 명예가 주는 이해관계가 얽힌 인위적인 것에 인생의 최종 목적을 두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본연의 의미를 찾아 이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삶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얻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별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 하는가 아닌가의 차이는, 하나의 작은 미물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자세에서부터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는 오늘도 저마다의 영역에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향해 숨 가쁘게 앞만 보면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가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가치 있는 마음의 양식이 되었는지는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왔던 간에 거울을 비추어 자신의 내면에 모습을 들여다보고 무슨 생각이 드는지를 잠시만 돌이켜보자. 어떤 이는 행여나 의식적으로 스스로가 부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은 불안과 걱정의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어제도 그저께도 그랬듯이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의욕도 느끼지 못하면서, 그저 살아야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의미한 하루를 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부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주어진 자신의 인생을 주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원인은 결국 성숙한 자신을 위한 철학의 부재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그러한 관점에서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이행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지혜로운 철학의 방식을 알려주고 있어 눈길을 이끈다. 따라서 살아가는 것에 때로 무력감을 느껴 우울해지거나,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한 이가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변화의 시간을 한번 가져보면 좋을 듯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철학의 한 방편은 바로 걷기다. 걷는 것이란 그 누구의 도움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행동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동안 무겁게 자신의 어깨를 짓눌러왔던 일의 속박이나 습관의 굴레를 모두 내려놓고 가볍게 산책 하듯이 자연을 벗 삼아서 걸어보라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 무엇도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 자유를 맛보기도 하고, 바깥세상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본모습을 들여다 볼 것을 조언한다. 그렇다 보면 문명이 만들어 낸 각종 기계들의 시끄러운 잡음도 없고, 사람들의 다툼의 소리도 없는 잠깐 동안의 고독의 시간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자신만을 위한 충만한 침묵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걷기를 통해 어느 정도 평안한 상태에 놓이다 보면, 그동안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얻음과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삶의 에너지를 채우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오해에서의 혼란스러움과 신체적 고통의 압박을 단순히 걷는 것으로 해결했으며, 오히려 사유의 폭이 확대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에게는 세 번의 위대한 걷기의 체험이 존재했으며, 문학가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도시를 한가로이 걷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걷기가 있었기에 융합의 심연 속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으로 성지를 찾아 참배하는 순례자들의 행위나,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도 바로 걷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다.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빠름이라는 것이 어느새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빨리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빠른 것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고 답답한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빠른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빠른 것만을 강조하다보면 우리에게서 여유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게 마련이고, 특히 무엇을 하든 깊이 관조하는 기회를 놓쳐버리기 쉽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걷기의 철학이란 그런 빠름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걷는 것은 무척 단순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걷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어느 순간 닫혀있다고 생각한 자신의 마음이 열리게 하고 생각이 트이게 하며 또한 몸을 일깨우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말대로 때로는 마치 높은 산 위에서 속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자연 속에 자신을 편안히 내버려두고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두 발은 땅에 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기를 해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어쩌면 책을 보거나 돈을 버는 것보다, 오히려 걷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음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에서 보듯이 많은 철학자와 문인과 사상가들은 걷는 것으로 자신만의 굳건한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이 없는 상태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게 산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철학이 없는 삶은 대답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공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걷기를 실천함으로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삶을 보다 열정적으로 향유하고, 또한 자유롭고 풍요로움이 동반된 철학적 사유의 즐거움을 얻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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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나남창작선 118
이병주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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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언제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치, 경제적으로 힘든 난세의 시기이거나 혹은 획기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었던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영웅적인 인물들의 사상이나 행적들은 훗날의 세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 최근 TV 사극을 통해 조선의 건국에 초석을 마련했던 정도전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그동안 과소평가되어 왔던 그의 정치적 업적이 다시금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조선시대의 역사과정에서 조선왕조가 오백년의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과정에서 그 기반을 다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의 과업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제라도 대중들에게 폭넓은 시각에서 다루지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정도전에 대한 인물의 공과 사를 논함에 있어 함께 다루어져야 할 할 인물 중에서 우리들이 간과할 수 없는 이가 있다. 그는 다름 아닌 고려말기의 충신으로 대변되는 포은 정몽주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역사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는 독자들이라면, 정몽주라는 인물에 대하여 단순히 학교 교과서에서만 봐왔던 것이 전부라고 할 만큼 그 상세한 내용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정몽주라는 인물이 우리에게는 단순히 조선개국에 반대하는 고려충신의 이미지로만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소설이라는 한계적인 측면과 다소 저자에 의한 주관적인 관점이 개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사료를 바탕으로 하여 정몽주가 밟아온 그의 일생을 추적해 보면서, 고려 말 핵심적인 정치인으로서 그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정몽주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료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고려 왕조를 계속적으로 이어가려는 그의 정치적 신념을 반대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되기까지, 역사사료를 바탕으로 한 그의 생애가 생생하게 재구성되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정몽주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시대배경을 고려해봐야 한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활동을 구가하던 시기는, 고려의 왕조가 조선의 시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대내외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과 같은 기득권층들의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외부적으로는 중국이 원에서 명나라로 교체되어 가는 어수선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고려왕조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대화와 타협으로 원만한 해결책을 도모했으며, 주위로부터 적잖은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새 왕조를 일으킨 이성계가 어떻게든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점에서 여실히 증명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는 급진적인 개혁의 방향보다는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낡고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는데, 이 부분에서 정도전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임으로서 억울한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에는 정몽주가 행해왔던 정치의 두 가지 측면이 비교적 크게 부각되어 전개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과거시험을 통해 나타난 그의 능력을 조정에서 높이 인정하여, 명나라와 일본과의 국제관계에서 오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외교사절로서 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상대국에게 예절을 다하되, 대신 신뢰를 얻어 실리적인 외교를 이끌어 왔음을 볼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국내의 정치활동에서는 친원세력과 친명세력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는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면서, 세력 간의 화합을 통한 상생을 고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작품을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기 전에 독자들이 우선해서 감안해야 할 것은, 저자도 책의 말미에서 밝혔지만 정몽주의 생애와 관련하여 아쉽게 여겨지는 부분이 몇 가지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외에 그의 정치적 활동을 상세하게 되살펴볼 수 있는 많은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는데다가, 그것 역시도 세종과 문종 때 왕명에 의해 편찬된 것이어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견지한 사료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과, 또한 그 시기의 역사사료들이 그렇듯이, 그 내용에 있어서도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표현들이 많아서,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저자의 임의적인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부분을 어느 정도 감안해서 읽어보았으면 싶다. 이 작품에는 정몽주가 관료로서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당시 고려의 대내부적인 여러 문제점을 고려해볼 때, 그의 정치적 입지는 어쩌면 숙명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을 해본다. 소설 속 주인공 정몽주는 고려 말 무능한 왕권과 기득권층들의 부패가 날로 극심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제 역할을 다하며 충신으로서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흐름으로 볼 때, 그의 처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끝까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올곧게 자기 소신을 지켰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정몽주는 이익에 있어서 개인보다는 국가가 우선순위가 되는 보수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기에 정몽주가 택한 정치적 신념이 과연 옳았던 것인가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정당성을 잃은 이성계 세력에 의한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고려왕조에 대해 신하로서 충과 의를 다했던 그의 정신은 어떠한 경우라도 폄훼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하며, 아울러 이러한 그의 모습이 독자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작금의 국내 정치인들에게도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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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 2014-06-0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포은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