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말이 후대의 내 말인 줄 누가 알았으랴. 나에게 시의 '때'가 곧 시의 '곳'인 것.

 

 '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즉각의 자문자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정녕 이렇다면 시는 죽음 앞에서, 죽음 속에서 시이다. 궁극도 근원도 굳이 필요 없다.

 

 [서동시집]에서 괴테는 자기 자신을 '시들의 저자'라고 말한다. 그대로 본뜬다면 나 또한 이 시편들의 저자이다.

 

 이것은 베네체아에서 보낸 내 80세 절반에 걸쳐 나와버린 것이다.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렸다. 귀국 다음날부터 그런 노릇이 시차 따위도 없어진 채 조금 이어졌다. 이런 내 시의 행위가 어쩌면 한반도 일대의 빈약한 고대 시가에 대한 후대의 벌충일지 모른다는 것, 듬성듬성한 근대시에의 혈연적인 보강인지 모른다는 것에 어느만큼 연유할 것이다. 나 자신이 나 이전이기 때문이고 나 이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의 부록은 출국 전까지 몇군데에 발표했던 것들인데, 시집 [내 변방은 어디갔나](창비 2011) 이후에 해당한다. 따로 묶어둘까 했는데 그것들이 여기에 따라붙었다. 내 안성 시대를 마감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P.5~6 )

 

 

 생득관념은 아주 오래되었다. 동방에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이고 저쪽에서는 플라톤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말라르메도 어디선가 '노래는 타고난 샘으로 솟아난다'고 그답지 않게 말한 적 있다.

 그런데 이런 관념은 내 앞에서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에게는 그것이 바로 유아성(幼兒性)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철학적 아기'라는 것이 '예술적 아기'를 가능케 한다면 나야말로 시의 아기인 것.

 

 시와 관련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나는 거의 동시적으로 아직도 덜 자란 삶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비역설적으로 유년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로써도 내가 누구의 예(例)로 말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껏 지니고 있던 한마디를 아껴둘 까닭도 없이 내뱉는다면 나는 시를 처음 쓰는 것처럼 쓴다. 그래서 뜨겁고 울고 싶고 밤을 몽당 토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만약 내가 시의 진실의 기념이라면 그 기념은 아기의 진실이기도 하고 멍텅구리의 진실이기도 해야겠다.

 

 밤도 여러개로 쪼개어졌다. 새벽도 맨숭맨숭했다. 이런 시의 철야에는 내 진부한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제멋대로 출몰하기 마련이다. 시에 대한 아기의 회의도 이따금 생겨난다. 세살 적 '왜?' '왜?' '왜?'처럼 말이다.

 과연 시는 시인가, 아니 시는 시가 아니어야 하지 않는가. 시가 시에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가 그것들이다. 이럴 때 내 시의 55년은 영락없이 시의 영년(零年)에의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유아기의 세월을 회고할 지 모른다.  (P.6~7 )     /  [서문]에서

 

 

 

 

 

 

           무제 시편 231

 

 

 

 

        김수영이 죽은 다음 날

        마포구 구수동

        그 파밭이 있는 집

        빈 양계장이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집

        그 집 대문에 들어섰다가

        물씬 죽음의 냄새가

        나에게 몰려와

        나는 흠칠 물러서고 말았다

        악취 이전

        비린 수박 냄새인지 오이 냄새인지 그런 냄새였다

 

        나는 문상객 찬 그 초상집을 떠나 버렸다

        청진동으로 나와

        해장국집에서 낮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마음 다잡고

        다시 시내버스 타고

        그 집에 갔다

        정한모한테 하드롱 봉투 얻어

        거기에

        조위금 한푼 넣어 던지고

        영정 사진 앞에 앉으니

        김수영의 누이 수명이 달려나와

        멈추었던 통곡 터뜨리며 달려나와

        니가 죽였어

        니가 죽였어

        고은 씨가 죽였어 하고

        내 등짝 치며

        더 큰 통곡이다가

        그 무작정의 통곡 어느만큼 기울어지고

        나를 시신 안치된 방으로 데려가

        흰옥양목 이불 호청을 걷어내고

        눈감은 김수영을 보여주었다

        그 커다란 격정의 눈이

        그 서양눈이

        어디 가고

        석가여래 실눈같이 감겨 있었다

 

        그제야

        내 몸속에 들어와 있는 죽음의 냄새가

        그 초록빛 비린 냄새가

        아니 그 미역 냄새가

        일시에 흩어져버린 뒤

        기침 소리가 났다

        탁!

        침 뱉는 소리가 났다

        기계적인 환청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닌 진실의 수순(手順)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의 벗 유정과 더불어

        녹번동 암자 사십구재 뒤

        밤 이슥도록

        술맛 지독하게 달았다 다디달았다

 

        죽음의 냄새란

        이승이 저승으로 바뀌는

        술 냄새이기도 했을 법  (P.383~385 )

 

 

 

 

 

          무제 시편 310

 

 

 

 

        한 번쯤 섬이 되게나

 

        한밤중 동백꽃 목 떨어지는 밤

        그 섬이 되게나

 

        한 번쯤 그 섬에서 건너와보게나  (P.507 )

 

 

 

 

 

 

          무제 시편 335

 

 

 

 

         뜨거운 것이 식은

         따스함

         차가운 것이 녹은

         따스함

 

         따스한 내 마른 몸으로

         따스함의 청사(靑史)를 읽는다

 

         사마천에게는

         한족(漢族) 밖의 따스함이 전혀 없더라

         [사기열전] 읽고 나니

         세상이 다 식었더라

 

         도대체 역사란 끝내 냉혈일 터

 

         역사 없이 사는 오랜 백성

         역사 모르고 사는 오랜 백성 만세 (P.545 )

 

 

 

 

 

           무제 시편 345

 

 

 

 

          나무 있으면 된다

          내 슬픔을

          나무가 나누어 간다

 

          나무 있으면 된다

          내 괴로움을

          나무가 갈라준다

 

          누가 그랬던가

          나무가 가장 가까운 신이라고

 

          나무 밑에서 죽고 싶다  (P.560 )

 

 

 

 

 

            무제 시편 510

 

 

 

 

           사전을 펴네

 

           얼라!

           얼라!

 

           오래간만에 뵙는 낱말 있네

 

           얼라!

 

           처음으로 뵙는 낱말 있네

 

           그리움과 새로움 함께 살고 있었네

           돌이켜

           내 삶의 헌책에도

           아는 것과 많이 많이 모르는 것 저울 없이 함께 있었네  (P.831 )

 

 

 

 

 

              오늘 참 좋다

 

 

 

 

            이상한 노릇 아니라면 아니지

 

            오늘

            아내의 귀로

            새소리 몇개를 들어 마지 않는다

 

            마당 가운데

            멍멍이 에미나이와

            새끼 셋이 조붓조붓 장난치는데

            에미나이야 벙어리로

            새끼들 소리만 있다

            그 소리도 아내의 귀로 들어 마지 않는다

            또한 아내의 눈으로 본다

            여태껏 잘 못 본 것들을 새로 본다

            좋다  (P.960 )

 

 

 

 

 

                 꿈

 

 

 

 

           신새벽 신앙 따위

           잘난 고답시편 따위

           못난 형이상학 따위 사절

 

           어디에도

           배고픈 이 없는

           밥 먹고 지고

 

           어디에도

           전셋돈 없는 이 없는

           내 집 거실에 앉아

           TV 명화극장 영화

           총 없는 영화

           새벽 두시까지 졸지 않고 쫄지 않고

           보고 지고

 

           그 새벽 세시 지난 꿈  (P.961 )

 

 

 

 

                                              -고은 詩集, <무제 시편>-에서

 

 

 

 

 

         20일에 선물 받은 책을,

         일을 하는 동안에 짬짬이 읽었다.

         책상에서도 읽고, 바닥에서도 읽고 그러다

         추우면 이불속에서 배 깔고 누워도 읽는다.

         중학교 때, 금호동 산꼭대기 친구네 집 책장에서 처음 만났던

         그 황홀했던 시인의 詩들을 따라 내내 지금까지 그렇게, 읽는다.

         창백하고 파리했던 시인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고 나도 중년의 사람이 되었지만

         뭐, 어떠랴. 헛헛한 삶길에서 뜨신 곰국 안주 삼아, 오래 묵은 좋은 술 한잔 취하듯

         그렇게 그윽했으면 됐지 뭐.  오늘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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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시경 2013-11-29 13:09   좋아요 0 | URL
평화로운 금요일 오전,, 서점에서 책 몇권을 사고~혼자 커피 마시러 왔어요^^ 멋진 시와 글을 읽으며 따뜻한 시간 보낼께요~행복한 시간 되세요~

appletreeje 2013-11-30 09:58   좋아요 0 | URL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행복하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

2013-11-29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30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11-29 14:15   좋아요 0 | URL
사랑하며 살아온 이야기가
시노래 하나로 안겨
차곡차곡 모이니
시집이 되네요

appletreeje 2013-11-30 09:59   좋아요 0 | URL
그야말로 유성우(流星雨)가
내리는 듯한, 詩集이였어요. ^^

프레이야 2013-11-29 15:05   좋아요 0 | URL
아내의 눈으로 본 세상이 그렇게 또 아름답군요. 사랑은 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페이퍼 참 좋아요. 지금처럼 따스함 스미는 하루 보내자구요^^

appletreeje 2013-11-30 10:00   좋아요 0 | URL
예~시인께 아내는 그런 분이더군요.^^ <무제 시편>, 전에 나온 詩集
<상화 시편 : 행성의 사랑>을 읽으며 마음이 참 절절했어요..
프레이야님께서도 상화 시편, 읽으시면 그러실 듯 해요.
늘 따스하고 감사한 프레이야님!~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후애(厚愛) 2013-11-30 15:37   좋아요 0 | URL
시들이 참 좋습니다!!!!*^^*
<무제 시편>은 소장용으로 참 좋은 것 같아요~
좋은 시들을 올려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 드리고 고맙습니다~!!!*^^*

즐겁고. 알차고 행복한 주말되시고 또 감기조심하세요.~*^^*

2013-11-30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2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