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엽서
바람에 쓸리는 나뭇잎을 보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네
빛 고운 이 낙엽 나라
가을은 얼마나 깊은가
아름다운 이 세상 보았으니
그대 향한 이 마음과
좋은 시 한편 쓰는 일 말고
무엇이 나에게 남아 있겠는가 (P.31 )
그리운 나무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대신 전하는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P.70 )
시인 고은
그는 정규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요
머슴 대길이가 우리글을 가르쳐주었답니다
생각하거니, 식민지가 무엇을 가르쳤겠습니까
차라리 무학이 그의 문학을 만들었다고 봐야지요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요 그러나 이런 비문(非文)이
기막히게 명문이 되는 지점에 고은의 문학이 있습니다 (P.57 )
무쇠솥 같은 거나
무쇠솥 같은 거나
마음속에 걸어두고
괄은 장작불 석달 열흘은
지펴야 하리
마음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으니
세상 오래 달궈야 하리
무쇠솥 같은 거나
세상에 걸어두고
석달 열흘은 식은 마음
달궈야 하리 (P.73 )
옥천
지용의 고장
옥천은 시의 나라
울에도 담에도 나무에도
돌 속에도 시가 사네
시가 깃든 바람벽이
창밖으로 비껴가니
시인은 그게 신기해
벽에 날개가 있다 하네
시가 있는 가게를 지나
동화의 나라 아이들은
시를 입에 물고 좋아라
천사같이 날개짓하네
노래 되어 날아오르네 (P.86 )
-정희성 詩集, <그리운 나무>-에서
'저문강의 삽을 씻고'의 정희성 詩人의 여섯 번째 詩集,
<그리운 나무>가 나왔다.
'시인의 말' 첫 문장처럼 '시가 어지간히 짧아졌다'.
-지금부터 12년 전에 낸 그의 네번째 시집 <시를 찾아서>
에 [말]이라는 시가 들어 있고 그 시의 끝 부분에 "나는
말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겠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갖도록 자극을 준 의인은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
옥산에 사는 민지라는 아이였다. 그때 다섯살이라 했으니
지금은 성숙한 여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민지는 산기슭에
돋아난 잡풀들에게 아침 일찍 물을 주며 잘 잤느냐고 인사를
한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라는 시인의 물음에 민지
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꽃이야"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민지에게는 그것이 무가치한 풀이 아니라 소중한 "꽃"이다. 우리 모두 '꽃'이라고 말해보자.
이 말에서 시가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슬퍼하고 시속을 개탄하는 시의
근원이 여기에 있음을 안다면, 정희성의 시에서 울려오는 말의 힘을 충분히 감득할 수
있을 것이다.- (p.89 )
2013년, 충북 옥천군 지역에서 실시하는 제25회 지용문학상 수상자에 정희성(68) 시인이
'그리운 나무'로 선정됐다.
정희성의 '그리운 나무'...진혼과 저항, 한거의 뿌리
최근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시인 정희성(68)이 여섯번 째 시집 '그리운 나무'(창비시선)를 내놓았다. 정 시인은 1970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해 '답청(踏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 등을 펴낸 시단의 기둥이다. 시 제목인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전국 곳곳에 주막 혹은 한식당 이름으로 걸려 있을 정도로 대중 친화적인 애송시다.
정 시인은 구두점 하나까지 완벽한 퇴고 없이는 한편의 시도 내보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등단 40여년만에 여섯번째의 시집을 내놓을 정도로 과작인 이유다. 끊임없이 언어를 조탁해 우리 말의 깊이를 더욱 풍요롭게 한 것도 시인의 미덕이다.
어느덧 고희를 바라보는 고갯마루에서 “바람처럼 살아온 나날”(바람 부는 날)을 겸허하게 되돌아보며 결 고운 “좋은 시 한편 쓰는 일 말고/무엇이 나에게 더 남아 있겠는가”(가을 엽서)라고 말하는 시인의 나지막한 음성은 여전히 세상에 대한 애정, 불의에 대한 저항성을 내포한다.
무엇보다 이번 시집에는 참세상을 위해 애쓰다가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시가 눈길을 끈다. 김근태(그대를 잊지 못하리), 리영희(눈 밝은 사람), 김대중(건봉사 불이문 앞에서 그대 부음을 듣고), 노무현(봉화산) 등 시대의 숭고한 넋들을 진혼한다. 이는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기약이다. “이 맥 빠진 불임의 시대”(우리들은 꽃인가)에 “오래전에 죽은 이들을 생각하”며 “더는 슬픈 기념일을 만들지 말자”(2010년)는 울림이기도 하다.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구나/나더러는 조시나 쓰라 하고/김근태가 또 먼저 갔다/고문 끝에 온 민주주의가/견디다 못해 몸이 굳어져갈 즈음/그 모진 고통의 기억/잊어버리고 싶기도 했겠지//우리들의 정신적인 대통령/그대를 잊지 못하리/그대가 몸 바쳐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와/민주주의를 향한 눈물겨운 꿈의 세포는/살아서 이 시대를 견디고 있는/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2012년 새해 아침을 탈환하리"('그대를 잊지 못하리' 전문)
이어 시인은 “좀비들만 지상에 남”은 “죽은 시인의 사회”(부끄러워라)에서 “다 내려놓고/단순하게 살고 싶”(한거(寒居))다는 소망마저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그러나 시인은 한거가 단순한 현실 도피는 아니다. 시인이라는 존재는 “폭탄이야 어디에 떨어지든 누가 죽든” " 아랑곳없이 무참하고 “무자비하게 응징하라 다그”(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쳐야 하는 시대의 언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 시인은 한라산 바람의 목소리를 빌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노래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바람의 노래)며 폭력 앞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을/도심 속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있다/(…)/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이상한 나라의/황혼이 짙어지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기 시작하고/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죄를 지어/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촛불을 들고 어두운 감옥으로 가리라/감옥 밖이 차라리 감옥인 세상이기에"('물구나무서서 보다' 부분)
그의 주제는 '평화'다. 시인은 “풀잎보다 더 낮게/허리를 굽히”고 한껏 “자세를 낮추”(두문동)며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원리, 조화로운 삶의 가치를 노래한다.
"음지식물이 처음부터 음지식물은 아니었을 것이다/큰 나무에 가려 햇빛을 보기 어려워지자/몸을 낮추어 스스로 광량(光量)을 조절하고/그늘을 견디는 연습을 오래 해왔을 것이다/나는 인간의 거처에도 그런 현상이 있음을 안다/인간도 별수 없이 자연에 속하는 존재이므로"('음지식물' 전문)
이번 시집에 대해 구중서(문학평론가)는 "시인의 의식은 비판이나 주장이 아니고 진지한 성찰에 있다"면서도 "그리운 나무에서는 시적 안목이 확장돼 뉴욕 9.11테러,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지대까지 이르러 인간 중시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