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따가운 햇살에 과일이 영글어가는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이다. 시내 나가는 길가에 작은 사과밭이 있다. 나는 붉은색이 감도는 사과꽃이 피던 봄부터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겨울까지 사과나무를 지켜 보았다. 눈 내린 다음 날은 하얗게 핀 눈꽃도 보았다. 무더운 여름도 혹한의 겨울도 이겨낸 나무다.
올 가을에는 가지가 휘어지도록 탐스러운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예쁘고 고운 빛으로 붉게 익어가며 자태를 자랑한다. 사과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이른 봄부터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해서 꽃이 피고, 벌과 나비들이 꽃가루를 부지런히 옮긴 수
고로움으로 지금의 사과가 결실을 맺은 것이리라. 어디 사과나무만 그렇겠는가.
강원도 산골에 있는 현덕사 도량에도 감나무 몇 그루가 나와 함께 산다. 가을이면 제일 먼저 감잎이 예쁘게 물들고 붉게 익은 감이 파란 하늘을 이고 있다. 시골 절을 찾아온 도시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마치 그림같이 아름답다고 한다. 잘 익은 감을 따서 곶감도 만들고, 빈 항아리에 넣어 겨우내 먹을 홍시를 만들기도 한다. 토종 납작감이라 보기에는 볼품이 없어도 곶감이나 홍시맛이 그렇게 달고 좋을 수가 없다. 홍시에 흰 가래떡이라도 찍어 먹으면 정말 꿀맛이다.
그러나 이 맛있는 홍시도 몇 년 후에는 못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양봉농가의 토종벌들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전염병 때문이라고 한다. 지구의 변화가 이곳 현덕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벌과 나비 같은 곤충들이 없어진다면 수분은 이뤄지지 않은 채 꽃만 폈다 져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수도 있다. 그러니 자연보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도 '개발'이라는 미명을 내세워 집채만 한 중장비로 전국의 하천이나 산을 깎고 파고 메우는 온갖 만행이 저질러 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몇 년 전 전국을 물바다로 만들어 사랑하는 가족을 흙탕물에 떠내려 보내고 집과 논밭을 잃어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했던 루사의 악몽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물은 틀림없이 제 길로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니 자연환경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훨씬 더 안전하고 행복하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겨울 양식을 모으려고 부지런히 쫓아다니는 귀여운 다람쥐를 바라본 적이 있다. 다행히 올해는 밤도 도토리도 풍년이라, 양 볼 가득 열매를 물고 가는 다람쥐의 모습이 한없이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언젠가 사람들의 탐욕으로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먹을거리가 없어지면 불쌍해서 어찌 볼가 걱정이다.
사실은 다람쥐보다 우리 걱정부터 해야 될 것 같다. 어느 해 김장철에 김장독을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그만 실수로 다람쥐의 보금자리를 건드린 적이 있다. 다람쥐는 가족을 이루어 공동생활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곳이 부처님이 계신 절 도량이어서 그런지 홀로 사는 '독신 다람쥐'였다. 도토리를 비롯해 온갖 열매와 씨앗의 껍질을 깨끗이 까서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게 작게 한 되나 되었다,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장만했는지 한 웅큼 집어 먹고 싶을 만큼 맛있어 보였다.
만월산 다람쥐는 오늘도 땅속 깊숙이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부지런히 가을을 수확하고 있을 것이다. 다람쥐가 계속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면 좋겠다. (P.121~124 )
-현종, <산사로 가는 즐거움>-에서
가을이다. 그것도 미치게 좋은, 가을의 어느 토요일 아침이다.
어젯밤을 쾌속으로 달리고 나니 속도 쓰리고 눈꺼풀도 무겁고 입도 깔깔한지라
달걀 푼 뜨거운 육개장에 밥을 말아 조금 속으로 내려 보내고, 따끈한 녹차를 한 잔
마시고 나니 이제사 조금 살 것 같다. "가을 날씨가 넘 좋다. 나와서 놀자" 하는 문자가
온다. 물론 체력이 방전 되어 못 나간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아무 궁금한 것 없이
게으름을 피우며, 혼자 적막의 포로가 되어 놀 것이다.
어젯밤의 그 술집 옆 그 서점에서 이달에도 역시 월례행사처럼 선물받아 온 몇 권의 책
들을 펼쳐 보며 논다. 현종 스님의 <산사로 가는 즐거움>은 딱 오늘같이 혼자 노는 날
고요하고 즐겁게 읽기 좋은 책이다.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책으로 가는 문>, <아빠
에게 말을 걸다>,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 <지극히 적게>, <토이 크레인>.
선배님! 이번 달에도 그 술집 옆 그 서점에서 또 책을 선물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산사로 가는 즐거움>의 '감나무와 다람쥐'를 읽다 조영석의 <토이 크레인>의 詩 '지리산
천왕이'를 읽으니 마음이 무겁다.
우리 제발, 사람도 벌도 나비도 나무도 다람쥐도 곰도 꽃도 달팽이도 고양이도 강아지도 다 함께
어울려 예쁜 세상을 살 수 있는 좋은 삶을 살자, 제발 말이지.
순례자2
모국어가 사라지는
그 길 위에서만
탄생하였네
위대한 순례자는
하여 모두가 벙어리였다네
온몸으로 길을 걷는 그대여
온넋으로 속죄하는 그대여
두고 온 물과 흙을 그리워하며
혀가 잘린 아픔을 노래하게
거기가 어디든
그곳이 바로
순례가 시작 되는 곳이니
말이 아닌
이 세상 모든 것으로 노래하게. (P.60 )
-조영석 詩集, <토이 크레인>-중
이 책들을 야금야금 맛있게 먹으며 잘 지내자,
좋은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