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김해자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색과 주황빛이 만나 줄을 이루고
무늬 새기어 제법 그럴사한 타올로 팔려 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 안아주고 닦아 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온 이래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 주며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럽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 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
화엄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 쓰다 놓아 버릴 이 몸뚱이 (P.18 )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P.54 )
함승현 옷수선집
이사라
동네에는 항상 뒷길이 있다
뒷길에는 햇빛도 비스듬히 내려와 앉는다
낡아서 보풀이 일어나는 옷처럼
흑백의 그림자로 앉아 있는 사람
바닥에 뒤엉켜 무늬가 된 실밥들이 그 사람의 생이다
달콤한 것들은 늘 같은 배경으로 물러서 있고
뽀얀 국물 한 그릇이 눈물보다 진한
그곳을
사람의 냄새로 당신이 다가 간다면
자기 이름을 건 옷 고치는 집
함승현 옷수선집의
무수한 실밥들이
이팝나무에서 떨어지는 꽃뭉치처럼
한바탕 골목을 뒤흔드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오래 쓴 도시락이 창가에서 졸고
외짝문 앞에서 흠뻑 물먹어 탐스러운
작은 화분 몇 개가 나른하고
가끔씩 그 사람 마저 조는 오후라 해도
사람 마음마저 수선하면서
이제는 버릴 것들 과감히 버리라는 조용한 충고도 듣게 될 것이다
한 평 반의 실낙원에서
혼자된 몸으로 오랫동안 효녀였던
돋보기쓴 사람 하나가
신의 이름을 빌려
시간을 늘리고 줄이고 꿰매고 있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평소에는 침묵에 익숙한
그 사람이
동네 뒷길에서는 오래된 뒷심이다 (P.140 )
가을의 소원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에 슬어 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 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P.102 )
선술집
고은
기원전 이천 년쯤의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시'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 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굴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냐 (P.156 )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사이버문학광장 '문장'의 '문학집배원' 꼭지에서 도종환, 안도현 시인에 이어 세 번째 문학집배원으로 선정된 나희덕 시인이 2008년 5월부터 2009년 4월까지 주마다 한 편씩 독자들에게 배달한 시 편지를 한데 묶은 책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사업추진반은 독자들이 문학을 좀 더 쉽고 가깝게 만나고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2006년부터 지금까지 1년에 시인 한 명을 '문학집배원'으로 위촉해 매주 월요일에 시 편지를 온라인으로 배달하는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이 책에는 김춘수, 박경리 선생과 같은 작고 문인부터 우리 시단의 어른인 정현종, 신경림, 정희성, 이시영 시인, 그리고 김행숙, 박진성, 이근화 등의 젊은 시인까지 세대와 시 형식을 구분 짓지 않고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를 담았다. 생의 경륜과 유려한 시어로 깊이를 더하는 시부터 톡톡 튀는 상상력으로 발랄함을 뽐내는 시까지, 여러 시인들의 다양한 시세계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