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한다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한다
존재에 대한 말 같았다
말의 감정은 과거로부터 와서 단단해지려니
나는 단단한 내 손목이 슬프지 않다고 대답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인데도 비를 셀 수 없어 미안한
밤이면
매달려 있으려는 낙과의 처지가 되듯
힘을 쓰려는 것은 심줄을 발기시키고 그것은 곧 쇠
락한다
찬바람에 몸을 묶고 찾아오는 불안을 피할 수 없어서
교차로에는 사고처럼 슬픔이 고인다
창가에 대고 어제 슬픔을 다 써버렸다고 말했다
슬픔의 일부로 슬픔의 전부는 가려진다고 말해버렸다
저녁에 만난 애인들은
내 뼈가 여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검어지며 건조해
져간다고 했다
손목이 문제였다
귀를 막을 때도 무엇을 빌 때도 짝이 맞지 않았다
손목 군데군데 손상된 혈관을 기우느라 밤을 지새
울 예정이다
저 바람은 슬픔을 매수하는 임무로 고단할 것이므로
나는 이제 내 손목에게 슬픔을 멈추어도 된다고 말
한다 (P.28 )
가늠
종이를 깔고 잤다
누우면 얼마나 뒤척이는지 알기 위하여
나는 처음의 맨 처음인 적 있었나
그 오래전 옛날인 적도 없었다
나무 밑에 서 있어보았다
다음 생은 나무로 살 수 있을까 싶어
이 별에서의 얼룩들은 알은체하지 않기로 했고
저 별들은 추워지면 쓰려고 한다
그 언젠가 이 세상에 돌아왔을 적에
그 언제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났을 때
이 땅의 젖꼭지를 꼭 쥐고 잠들었다
얼마나 놓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 (P.33 )
함박눈
행색이 초라한 어르신
게다가 큰 짐까지 든 그 곁을 따라 걷다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어요
한 끼만 묵어도 되는데
오늘은 두끼나 묵었으예
날은 추워
마음은 미칠 것 같아
담배나 몇 갑 사 드릴까 하고
담배는 피우시냐고 물어요
오늘은 두끼나 묵어서
안 태워도 되이예
이제부터 낮달과 제비꽃이 배고파 보여도
하나도 그 까닭을 모를라구요 (P.87 )
눈사람 여관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예요
밥은 더러운 것인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숙박을 가요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모든 계약들을 들여놓고
여관에서 만나요
탑을 돌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지요
길 건너편 숲조차도 사라지지요
등 맞대고 그물을 당기면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여관이겠어요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적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P.100 )
-이병률 詩集, <눈사람 여관>-에서
어제의 슬픔이 숙취가 되어 달려들어와,
김치를 쫑쫑 썰어넣고 고추장을 넣고 볶아서
'산동성'에서 찾아가지 않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
뜨거운 밥의 온기와 단무지 같은, 짧은 위로를 뱃속으로
아득한 터널같이 천천히 내려보내며, 가만히 앉아
이병률의 <눈사람 여관>을 읽는다.
햇살은 얼마나 누구의 편인가
무사했구나 싶었는데
떠나는 거였다 (p.118 )
가늠을 하다 여지(餘地)처럼 애별(愛別)을 남기고 사라지는 잠시,같은 너와 나의 詩들을
받아 먹으며, 나도 이제 내 손목에게 슬픔을 멈추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겨울에는 나도...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으로 가야겠다.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
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p.51 )
아마 이번 겨울은....눈보라가 치고 몹시 추울 것 같다.
그래서 미리 變奏曲을 준비하듯... 詩를 읽는다. 이제 저녁이다.
집으로 돌아올 식구들을 위해 환한 밥을, 새 밥을 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