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는 꿈
날아오면서 잠이 들었죠 공중에 뜬 채 꿈을 꾼거죠 휘몰아
치는 바람 속에서 책을 펼쳤는데 글자들이 다 흩어졌어요 벌
레처럼 꿈틀거리던 내 시집의 활자들이 활짝 활짝 날개를 펼
치고 날아올라 완벽하게 증발하는가 싶더니 검은 눈송이로
흩뿌려졌어요 속이 시원했어요 찬 바람 부는 테겔공항에 내렸
어요 봄 대낮에 출발했는데 겨울 어스름에 닿아 있네요 불안
한 내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저만치 휘발해 가는 밤이에요 (P.17 )
추궁
자전거를 못 타다니
그 실력은 어디 갔나 중학교에 자전거로 통학하기도 했는
데 수십 년 안 탔더니 다 잊어버렸나 몸으로 익힌 건 안 잊는
다는 말은 뭐였나 저 아줌마는 앞뒤로 두 아이를 태우고 차
도를 건너는데 나는 왜 자꾸 넘어지나 왜 자꾸 휘청거리는가
뒤에서 외친다 내가 내다버린 그 망가진 자전거로 어딜 가는
거요 하마터면 트랩에 칠 뻔 했다 붕떴어 개한테 준다 거짓
말하고 회식 후 남은 돼지정강이고기 챙겼지 자전거 뒤에 싣
고 왔는데 어디 흘려 버렸나 어디서 당신을 떨어뜨렸나 서둘
러 달려갈 때
이제 더는 여기에 없는 (P.25 )
이상한 나라에서 온 앨리스
이곳 사람들은 어지간히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집 뒤의 정원을
행인이 볼 수 없는 거기를 더
애지중지 가꾼다 이곳 사람들은
대체로 검소하다
가난한 예술가를 존중한다
다소 우대하는 것 같다
아시아 여자 단기 체류자 경제적 보증이 낮아도 시인이라서
시인이라서 셋방을 준다고 했다, 딸이 쓰던 아끼던 방을
겔링 부인은 말했다
집안에서 흡연은 절대 금지지만
시인이라서 시인이니까
부엌 쪽문을 열고 조금 피우는 건 이해할께요
한 번도 경험 못한 시인이라서 가능한 거
나는 여태껏 이상한 나라에서 살다 온 것일까 (P.31 )
밥심
나한테 피자는 간식인데, 베를리너들은 주식으로 먹는다.
식당에 가서 피자 한 판을 주문한 후 그 한 판을 혼자 다 먹
는다. 나는 참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본다. 값이 싼 피자 가
게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피자를 산다.
사자마자 길거리에서 피자 뚜껑을 열고 그대로 서서 방
금 산 한판을 혼자서 다 먹는다. 누구도 왜 길에서 식사하느
냐며 나무라지 않는다. 서로의 허기를 이해하는 분위기.
오늘 점심시간에 나는 연구소 지하 주방에서 쌀을 안치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 시간까지 점심 먹으러 나가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 밥을 주었다. 연구소 비서인 안드레아는 김치
찌개가 든 그릇을 다 비운 후에 김하고 계란찜하고 밥을 먹
었다. 그 맵고 짜고 신 김치스프를 한 그릇 뚝딱 다 비운 후
에야 밥을 먹는 명쾌한 싱글맘 안드레야. 한식 먹는 순서를
가르쳐 줄까 말까. (P.72 )
-김이듬 詩集, <베를린, 달렘의 노래>-에서
허수경 (시인)
: 이 시집 속에는 이듬이가 떠나온 것에 두고 온 것들과 독일이라는 이방에서 만나는 사물과 사람들과 풍경이 얽히고 설켜서 일렁이는 파랑으로 가득차 있다. 시 한 편은 이렇게 시작되어 저렇게 끝나지만 사실 이 시집에 들어 있는 모든 시들은 불쑥 첫행이 나왔다가 장면과 이미지들이 그려지면서 문득 끝난다. 시의 완성도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잘 쓰겠다라는 욕심을 그녀의 시들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자유의지로 선택한 유배지에서 겪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지상중계로 전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