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번 국도를 가다보면

 

 

 

 

              고향에 가면 아는 사람들이 있다.

              평촌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내 고향 용인으로 한 시간쯤 가다보면

              신작로 길가에서 맞이하는 쑥부쟁이가 보인다

 

              가겟집 낮은 지붕 아래

              먼지 묻은 막과자 몇 봉지가 흐릿한 등불 아래 졸고

              쪽마루에 걸터앉아 손님을 기다리던

              순분이 할아버지의 밭은 기침이 있다

 

              해 질 녘이면

              상여의 요령을 흔들던 사서방 아저씨의

              육자배기 구성진 소리가락과 비틀거리는 귀가가 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 걸려 있는 삼거리이발소를 지나

              엄마 아빠가 젊었던 고향집에 들어서면,

              씨를 뿌리지 않아도 피어나던 채송화 꽃밭에서

              쏟아진 햇살에 눈부셨을까,

              상을 찡그리며 찍은 흑백사진 속에

              단발머리 예닐곱 수줍은 내가 있다.

 

              고향에 가면

              어린날의 단편을 기억해주는 옆집 살던 붙들이 엄마와

              추억 묻은 풍경들이 살픗살픗 모여 있다.  (P.132 )

 

 

 

 

 

                  포도 브로치

 

 

 

 

               셋째 작은 어머니가 꽂고 있는 포도송이 브로치를 보고

               예쁘다고 하니 선뜻 주셨다.

               치자빛 스웨터에 여밈 핀으로 꽂으니

               작은 어머니의 단아한 모습이 다가왔다.

 

               어느 날, 브로치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슈퍼에서 물건 값을 계산하는데

               직원 앞치마에 브로치가 있었다.

              "이 브로치 어디서 사셨어요?"

              "주운 지 오래되었어요.

               잃어버린 분이 보고 찾아가라고 앞치마에

               매일 꽂고 있었어요. "

 

               그날, 잃어버린 브로치는 사연을 가지고

               다시 내게로 왔다.  (P.164 )

 

 

 

 

 

                  1호선 지하철안에서

 

 

 

 

                꽃들이 화사한 봄날에

                중년의 남자가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밀며 들어왔다.

                남자는 2천 원짜리 각질 제거기를 설명하다가

                지하철이 정차하면 내리는 손님을 아쉬워했다.

                그는 어떤 남자 앞에서

                멈칫, 당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을 풀며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인사를 했다.

                아, 자네 영업부에 근무했던 김 과장 아닌가, 애들은?

                큰놈이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붉어진 얼굴로 다른 칸으로 옮기려는 그에게

                어떤 사람은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여기저기서 각질 제거기를 달라고 했다  (P.165 )

 

 

 

 

                                                       -신채원 詩集, <분꽃이 피는 시간>-에서

 

 

 

 

 

 

 

 

 

 

 

엄마와 딸이 만들어낸 한 권의 하모니

엄마가 글을 쓰고 딸이 그림을 그려 완성한 책 『분꽃이 피는 시간』.

저자 신채원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여자로서의 다양한 역할 안에서 겪은 소소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매일매일을 특별하게 느끼는 섬세한 감성으로 자칫 지나치기 쉬운 나날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저자는 늘 감사하며 의미를 찾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 남편이 군인이었을 때 군부대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온 시간들을 쓴 글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군부대’라는 특수한 장소와 평온한 한 가족의 일상이 색다르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안에서 많은 사병들과 함께 생활하며 엄마 같은 마음으로 따뜻하게 그들을 챙겨주고 그들 또한 감사하며 인연을 맺어온, 저자에게는 삶에서 아주 특별한 곳임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군부대 안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끊임없이 소개하며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소녀 같은 감수성을 관찰하는 것 또한 이 책의 볼거리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기쁨을 누릴 줄 아는 그녀의 소박함이 우리의 일상의 피로를 잠시나마 풀어줄 것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3-07-08 11:17   좋아요 0 | URL
어릴 때 마당 한구석에 분꽃이 있었어요. 여름날 저녁만 되면 피기 시작하는 완전 분홍색꽃..

엄마와 딸이 만들어낸 시집이라니, 더 따뜻하고 아련하게 느껴지네요.

appletreeje 2013-07-08 13:54   좋아요 0 | URL
저희집에는 분꽃은 없었지만 어릴때 퇴계로 동물병원 많은 곳에 가서 유리너머로
얼굴을 맞대고 강아지들 구경하다 오는 길에 꼭 들렸던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또
땡볕아래서도 신나게 놀다 저녁이 되면 운동장 한켠에 붉은 맨드라미와 채송화, 분꽃이 있었지요..^^

이 시집에는 딸 최신혜님이 꼬마때 엄마의 시가 적힌 공책옆에 그린 크레파스 그림과 더불어 지금의 아름다운 일러스트 그림들이 정답게 엄마의 시 옆에 함께 있어 더욱 좋아요~ 그러고보니 제가 지난번 서점에서 사온 일러스트 엽서를 그린 분이라 더 반가웠어요. ^^

숲노래 2013-07-08 12:02   좋아요 0 | URL
날마다 작은 삶
알뜰히 여겨
그러모으다 보니
어느새 예쁜 시집이 되었군요

appletreeje 2013-07-08 13:58   좋아요 0 | URL
예~날마다의 예쁘고 소중한 마음들이 차곡차곡 모아져
이렇게 고운 시집이 나왔네요. ^^
엄마의 시와 따님의 알콩달콩한 그림이
함께하여 더욱 예쁜 시집이에요~.

보슬비 2013-07-08 19:46   좋아요 0 | URL
오늘의 시는 마음을 참 설레게하네요.

모든 사람들이 나무늘보님께서 올려주신 시를 마음에 품고 다닌다면, 얼굴 찡그릴일 없을것 같아요.

appletreeje 2013-07-08 22:59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오늘의 시들은 참으로 일상을 알뜰하고 귀하게 여긴 시라서
저도 정말 좋았습니다.~

안녕미미앤 2013-07-08 23:18   좋아요 0 | URL
저도 포도송이 브로치.. 갖고 싶어요! 하하하

appletreeje 2013-07-08 23:00   좋아요 0 | URL
히히히...저도요, 아참, 저는 사과 브로치요..ㅎㅎㅎ

안녕미미앤 2013-07-08 23:18   좋아요 0 | URL
사과 브로치도 예쁘겠다요^^ 치자빛 스웨터에 둘다 꼽아입고 싶네요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