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
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은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질들아
껍질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
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P.24 )
낮달
낮달은 한 무더기 찔레꽃이다
나비 떼 뽀얗게 날아올라
초여름 햇살, 꽃잎 꽃잎 떨어져 내린다
가던 길 멈추고 잠시 쉬어보는 숲길
찔레 순 꺾어 먹다 보면
저무는 어스름 저녁별
삼베빛 솜병아리로 짹짹거린다
해 지기 전 서녘 하늘가
밀가루 반죽처럼 둥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낮달
어디선가 국수 삶는 냄새가 난다
걸음걸음 탱자빛 노을이 흔들리고
새뽀얀 나비 떼가 흔들리고
숲길 깨우는 북소리, 둥둥둥 구수하게 익는다. (P.27 )
빗방울들
먹구름들, 그만 뭐 찔끔 쌌나보다
물비린내, 허공 가득 번져온다
제석산 입구, 허물어진 집터 아래
빗방울들, 투덕투덕 걸어간다
나뒹구는 후박나무 젖은 잎사귀들
훅 하니, 빗방울들의 귓밥 물어뜯는다
두근대는 후박나무의 숨소리들
빗방울들의 엉덩이 찬찬히 휘감는다
후두둑, 솟구쳐 오르는 물비린내들
입속의 석류알만큼이나 시고 떫다
슬픔들, 동그랗게 몸을 말아
흐르는 도랑물 속으로 굴러떨어진다
제석산 입구, 허물어진 집터 아래
빗방울들, 느린 발걸음 퍼뜩 치켜든다 (P. 49 )
구름묘지
바람이 제 작은 부리로 물어다 놓은 깃털이다
바람의 부푼 자궁이 오밀조밀 낳은 자식들이다
산비탈 절개지, 붉게 상처난 사타구니 한 구석
오조조, 씨앗털들 모여 구름 묘지 만들고 있다
반짝이는 햇살들, 은쟁반 두드리며 딸랑대는 시간들
밤꽃 향기 밀려와 그것들의 가슴 후끈 달아오른다
바람이 제 작은 부리로 쪼아 쌓은 깃털들이다
바람의 잘 익은 젖을 먹고 자란 솜사탕 어린 아기들이다. (P.114 )
-이은봉 詩集, <걸레옷을 입은 구름>-에서
인간에 의해 채색되지 않은 자연을 노래하다
198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공동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등단한 이은봉 시인의 등단 3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한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을 통해 시인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애정을 변함없이 보여주면서도 꽃, 나무, 돌과 같은 생명과 무생물에서 세상의 근원적인 가치를 발견한다. 한편으로 이미 중년을 넘어서버린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며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하는 내면의 목소리 또한 들려주고 있다.
잃어버린 신의 목소리를 찾아서
시인은 신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현대와 같이 인간에 의해 자연이 파괴되고 유린된 세상에서 신의 음성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문명의 방자하고 잔혹한 마수를 보면서 이 물음에 선뜻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오늘 구름은 고름 덩어리,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제 뱃속 가득 납과 수은과 카드뮴을 감추고 있다
이제 내 숨결은 달에게로 가지 못한다 달의 숨결도 내게로 오지 못한다
(중략)
기름때에 찌든 걸레옷을 입은 채 나와 달 사이에 철판 세우고 있는 저 구름을 어쩌지
끝내 바람이 구름의 걸레옷을 벗기지 못하면 누구도 잠들지 못한다
하느님조차도 눈 부릅뜬 채 몇 날 몇 밤을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지 못하면 어떤 영혼도 바로 숨을 쉬지 못한다 그렇게 죽는다.
_ 시 「걸레옷을 입은 구름」 부분
시인은 자연과의 교감을 원한다. 불안한 불면의 밤을 지내며 달과의 교신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구름은 고름덩어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걸레옷을 입고 온갖 중금속을 내장에 감추고 있을 뿐이다. 바람이라도 불어와 오염된 구름의 걸레옷을 벗겨주면 좋겠는데 바람도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잠들지 못하면 어떤 영혼도 바로 숨을 쉬지 못한다 그렇게 죽는다”라는 시인의 말은 생태계 파괴의 실상을 차갑게 반영한다. 이미 우리 사회는 새만금이나 4대강과 같이 개발 논리 아래 수많은 목숨을 잃어간 자연 파괴의 모습을 목도해왔다. 자연의 다른 이름은 생명일 것인데, 우리가 목격하는 자연은 이제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하지 못할 만큼 파괴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