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 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 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 뿐이다 (P.10 )
차나 한잔
입을 없애고 차나 한잔 들어라
눈을 없애고
찻잔에서 우러난 작은 새 한마리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라
지금까지 곡우를 몇십년 지나는 동안
찻잎 한 번 따본 적 없고
지금까지 우전을 몇천년 만드는 동안
찻물 한번 끓여본 적 없으니
손을 없애고 외로운 차나 한잔 들어라
발을 없애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
첫눈 내리기를 기다려라
마침내 귀를 없애고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첫눈 소리를 듣다가
홀로 잠들어라 (P.22 )
시각장애인 안내견
지하철을 탄 시각장애인 안내견 곁을
노숙자 한 사람이 낡은 허리를 구부리고
손에 든 모자를 내밀며 지나간다
아무도 동전 한닢 넣지 않는다
전동차는 수없이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시각장애인 안내견만이 천천히
끓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모자에 넣어주고
다시 주인 곁에 앉아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동호대교를 달리는 차창 밖에 초승달 하나
한강에 몸을 던진다 (P.43 )
배반
십년 동안
꽃 한번 피우지 않은 춘란을 뒷산에 버렸다
더 이상 배반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 한번이라도 꽃 피기를 간절히 기도했으나
기도는 언제나 나를 배반하고
나는 언제나 기도를 배반했다
그래도 혹시 내가 춘란을 배반한 게 아닌가 싶어
며칠 뒤
봄비가 그친 뒷산에 올라갔다
깨어진 화분 틈으로 춘란이 허옇게 뿌리를 드러낸 채
꽃을 피우고
저 혼자 빙긋이 웃고 있었다 (P.39 )
- -정호승 詩集, <여행>-에서